몇 년 전 아름다운 가게에서 사 놓고 묵혀 두었다가 이번 기회에 털어냈다. 사실, 뱀파이어라는 측면에서 끌리다가도 로맨스라는 장르에서 자꾸 손이 안가던게 사실이었다. 읽어보고 난 후의 느낌은, 잘 쓰여졌지만 역시나 장르의 한계는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총 4편으로 이어지는 시리즈 - 트와일라잇, 뉴문, 이클립스, 브레이킹던 - 는 뱀파이어 에드워드와 인간 여성 벨라의 사랑 이야기를 큰 축으로 여러가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세 가지는 아주 확실했다. 첫째, 에드워드는 뱀파이어였다. 둘째,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지 하고 있는지 나로선 알 수 없지만 그의 일부는 내 피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리고 셋째, 나는 돌이킬 수 없이 무조건적으로 그를 사랑하고 있었다.
여성 중심의 이야기 전개로 남자 주인공을 '백마탄 왕자님' 컨셉을 녹여내는 바람에 많은 남성들이 외면하고 있기도 하다. 에드워드는 미국에서는 역겹다고 할 정도로 젠틀함이 과하지만, 한국식 멜로에서는 익숙한 수준이라 그다지 거리낌이 들지는 않았다. 피에 대한 욕망을 참아내는 뱀파이어라는 설정이 당시로서는 꽤나 참신했고 다른 종족과의 사랑, 뱀파이어 특유의 아름다움 등이 잘 녹아들어 있는 점이 성공의 요인이었던 것 같다.
나는 제이콥이 내 가슴의 구멍을 치유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너무 아프지 않도록 최소한 작게 메워주고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틀린 생각이었다. 그는 자기만의 구멍을 뚫고 있었고 이제 나는 구멍이 숭숭 뚫린 스위스 치즈처럼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다. 왜 진작 조각나 부서져 버리지 않았는지 의아할 뿐이었다.
뉴 문에 이르면 제이콥이라는 늑대인간이 등장해 삼각관계를 이루기도 하는데 이 때부터 벨라의 행동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비상식적이어서 몰입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주변을 위해 한다는 모든 행위들은 결코 사태 해결에 도움을 주지 않고 있었으며 결국 본인을 가장 위험에 빠트리는게 본인인 상황을 만들어냈다.
그런데 파리스 쪽에 좀 더 무게가 실린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파리스가 줄리엣의 친구였다면? 그것도 가장 친한 친구였다면? 로미오가 떠나고 난 뒤의 참담한 고통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다면? 파리스야말로 진정 줄리엣을 이해하고 절반쯤이나마 다시 인간으로 살 수 있게 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면? 게다가 끈기 있고 친절한 성품으로 줄리엣을 아껴주었다면? 그리하여 파리스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줄리엣이 깨달았다면. 그리고 그가 진정으로 그녀를 사랑하여 행복하게 만들어주고 싶어 한다면....
에드워드를 포함해 수많은 이들의 희생까지 치르면서. 게다가 제이콥을 두고 어장관리하는 모습까지 보이는데, 한국이나 미국이나 똑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 어이없는 자기합리화라니. 뉴문 후반부부터는 도저히 주인공에 몰입이 되지 않는 지경이었다.
내 마음은 이제 수천 년 떨어진 곳을 헤메이고 있었다. 나는 야하 유타나 다른 늑대들, 또는 아름다운 차가운 여자 - 그녀의 모습을 나로선 너무나 쉽게 그려낼 수 있다 - 를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아니, 나는 그런 마법을 지니지 못한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다. 부족을 구한 세 번째 부인, 그 이름없는 여인의 얼굴을 상상하려 애쓰고 있었다. 특별한 재능이나 힘도 없는 보통 여자. 그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괴물보다 약하고 움직임 또한 느렸을. 하지만 그녀야말로 해결의 열쇠였다. 그녀는 남편, 어린 아들을, 부족을 구했다.
매우 매력적인 설화를 만들어 내 늑대인간과 뱀파이어 이야기의 당위성을 이끌어 냈다. 이 이야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로맨스에도 꿋꿋이 읽어 나갔는지도 모르겠다. 이해가 안되도 지루하지는 않으니까. 막장 드라마를 보는 심경으로 이클립스까지 마쳤는데 이야기보다는 사랑에 초점을 두고 있어 궂이 브레이킹던을 읽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래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좋은 작품이기는 하다. 개인적으로는 희생한다고 착각하고 먹진 척만 하고 있는 에드워드보다는 우직하게 마음을 표현하는 제이콥이 훨씬 친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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