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진이, 지니] 판타지 속에서 존재의 이유를 찾는 실험

슬슬살살 2019. 11. 12. 21:24

2000년 이후 한국 작가 중 가장 많이 파는 작가 정유정이 이번에는 유인원의 이야기를 들고 왔다. 그것도 판타지가 가미된. 보노보 원숭이와 정신이 바뀌어 버린 진이라는 여인의 이야기는 판타지나 만화에 더 가까운 이야기 구조다. 어찌 보면 말 같지도 않은 이러한 설정 속에서 정유정은 존재의 이유와 가치, 삶의 존엄성을 그려낸다.


순수문학보다 한 수 아래로 여겨지는 판타지, 그것도 흔히들 '양판소'라 부르는 장르에서는 이러한 '몸 바뀌는' 설정이 적지 않다. <왕자와 거지> 시절 부터 순싯간에 바뀌는 신분이 주는 매력은 변치 않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설정은 이야기를 급격하게 전개 시키기도 용이하고 별다른 장치 없이도 숨가쁜 상황을 만들어낸다. 다만, 판타지 문학이 비하 받는 이유는 대다수의 소설에서는 큰 고민 없이 상황을 타개해나가거나 신분의 변화가 주는 장점만을 취하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 잦아 식상해진 이런 방식을 정유정은 차용했다. 그녀의 문학과 다른 장르에서 닳고 닳은 컨셉을 가져오는 건 모험이었다. 자칫하면 우스꽝 스러울 수도 있었을테니. 그러나 그녀가 누군가. 정유정은 당연한 이야기를 하지도, 그 속에서 주제를 잃지도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꿈꾸지 않았다. 꿈을 꾸기엔 미래에 대한 욕망이 너무 약했고, 꿈 없이 살 만큼 삶에 대한 욕망이 강하지도 않았다. 4년이 지난 그날에도, 나는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이 운동장을 나선 이후의 4년은 내게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내 삶 전체가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었을런지도 몰랐다. 더 충격적인건,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 내 앞에 수십년이나 남아 있다는 점이었다.


먼저 남자 주인공 민주. 보노보 원숭이 속에 같혀 버린 진이와 소통하는 유일한 인간이다. 삶의 의지를 잃어 버리고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실패한 청춘에 다름아니다. 물론 그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지만 어찌 됐건 일반적인 관점에서 정상적인 삶의 궤도를 걸어나가는 인물은 아니다.


'진이의 몸'은 어디에 있는가. '지니의 정신'은 어디에 있는가. 여기에 앉아 질문을 던지고 있는 존재가 지니의 몸에 깃든 지니의 정신이라면, 나는 지니인가, 진이인가.


진이는 사육사다. 자연의 주인 행세를 하는 인간을 대표해 지니와 매개체 역할을 하는 예언자이며 벌을 받는 예수다. 사고로 인해 유인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며 그녀를 밀어내는 지니 본체의 정신과 싸움을 하고 지니를 이해하게 된다.


지니는 보노보 원숭이다. 평화롭게 살아가는 원숭이에 불과했으나, 인간에게 사냥당해 이 멀리 한국까지 끌려왔다. 인간의 욕심이 자연을 파괴한다는 너무나 구태의연한 슬로건의 실체이기도 하다. 적어도 어느정도 지성이 있는 보노보가 겪은 납치는 과거 흑인들이 감내했던 노예선의 이동을 상기시킨다. 인간은 어찌 이리도 잔인한가라는 질문과 생명체의 소중함, '지니'라는 개별 개체 한마리가 가지고 있는 개성 모두를 담고 있는 그릇이기도 하다. 하나 밖에 없는 그릇을 진이와 나누어 써야 하는 죄없는 동물.


우리는 진이와 민주가 협력해 몸을 찾아 나서는 과정은 일종의 장르문학처럼 신나게 받아 들인다. 그녀의 앙칼진 대응에 피식 웃기도 하고 바보같이 당하는 민주에게 이입되어 '진이 좀 선을 넘는구나'라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진이를 통해 오픈된 지니의 세계에서는 그렇게 웃기가 쉽지 않다. 동물에 불과한 지니의 삶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고 가치가 있었다. 그걸 파괴당한건 전쟁에 침략당한 인간과 다르지 않다. 인간의 죄악은 정말이지 최악이다. 그리고 마침내, 진이의 깨달음. 바뀐게 아니라 잠시 머무르게 해주었을 뿐이라는 깨달음과 그 이후의 선택은 너무나 당연한 인간의 선택이었다. 자연에 순응하고, 인간에 의해 파괴된 지니에게 그 기회를 돌려주는 선택은 쉽지 않았지만 너무나 존엄했다. 그리고 그 선택을 옆에서 지켜본 민주는 다시금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 정유정이 만들어낸 이 판타지가 어찌나 철학적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