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SF에 바치는 젤라즈니의 헌사

슬슬살살 2015. 6. 29. 23:09

SF의 거장 로저 젤라즈니의 단편집이다. 공포문학에 러브 크래프트가 있다면 SF에는 젤라즈니가 있다 할 정도로 자신만의 독특한 세계를 가진게 특징이다. 아서 클라크, 아이작 아시모프 같은 거장들이 있기는 하지만 젤라즈니의 SF는 보다 철학적이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을 일관되게 펼쳐 놓는다. 현대 소설에서 많이 쓰는 기법으로의 전환을 해 낸 것이나 미지세계에 대한 경외와 두려움을 담아낸 것. 그 만의 세계관을 창시한 것 등이 러브 크래프트와 많이 닮았다. 수록작 중 표제작인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와 <이 죽음의 산에서>같은 작품들은 러브크래프트가 썼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총 17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데 읽다 보면 너무 적다 느낄 정도로 몰입감이 대단하다. 사실 S/F와 공포는 단편이 핵심 아니겠는가. 특히 SF영화의 모티브가 된 작품들이 많으니 젤라즈니의 작품은 반드시. 반드시 읽어 보자.

 

1. 12월의 열쇠
기술이 너무 발달해 버린 어느 미래. 고양이의 몸으로 태어난 종족 하나가 자신들이 살 행성을 만들기 위해 수백 세기를 냉동 수면에 잠든다. 그 사이 진화 해버린 유사 인류가 이 고양이 종족을 신으로 받든다. 신성에 대해 잠깐 고민할 수 있게 하는 작품.

 

2.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우주의 어느 행성. 그 무엇 보다 큰 거대한 수중 짐승을 잡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그리고 있다. <이 죽음의 산에서>와 비슷한 얼개지만 보다 더 <모비딕>스럽다.

태어날 때부터 미끼 담당인 작자는 아무도 없다는 얘기를 나는 믿는다. 하지만 토성의 고리가 부르는 결혼 축가는 바다 짐승의 선물인 것이다.

 

3. 악마차
가장 고전 SF적인 작품이다. 생각하는 기계의 감성을 다루고 있는데 일반적인 로봇이 아니라 자동차라는게 흥미롭다. 생각하는 자동차들이 감성을 가지게 되는 과정과 결과를 그리고 있는데 감정 정도가 아니라 인격을 가진 자동차가 욕설을 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4.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이 책의 표제작. 우주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종족과의 조우를 담고 있다. 영화 <아바타>가 이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듯 하다. 화성인을 발견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교류가 없는 건 언어 문제 때문이다. 시인이자 뛰어난 언어감각을 가진 갤린저가 멸종 위기의 화성 종족과 대화하면서 무희 브락사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종족은 어느날 갑자기 남자들이 모두 생식 능력을 잃어 버렸다. 때문에 여성들만이 긴긴 시간을 살아갈 뿐 번식이 불가능하다. 지구인과의 섹스가 가능하게 되면서 종족은 다시 번영을 준비한다. 둘 간의 사랑을 비롯해 이 모든 것이 고대의 예언이었다는 건 또 하나의 반전이다.

나는 그대를 정복했노라, 말란이여- 그리고 승리는 그대의 것이다! 별들 사이에서 편히 잠들라. 저주받은 신이여!

 

5. 괴물과 처녀
1장밖에 안되는 짧은 글이지만 서술트릭을 사용한 강렬한 임팩트가 있다. 인신 공양의 제물이 되는 어느 종족의 이야기.

 

6. 이 죽음의 산에서
전체 작품 중 가장 재미있었던 작품이다. 지구에서야 에베레스트가 가장 높은 산이지만, 이 작품에는 우주에서 가장 높은 산에 도전하는 등반가들이 나온다. 높은 산을 오를 수록 어떤 환각들이 나타나 등반팀을 가로 막는다. 그 힘들게 올랐던 그 산은 예전 유원지였던 곳이다. 물론 바깥면으로 오르는 건 불가능하긴 하지만. 여기에 토착병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 냉동상태로 유지되고 있는 여인이 있었고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장치들이 작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젤라즈니가 사랑했던 설정이 냉동인간인데 여기에서도 잘 그려지고 있는데다 약간의 유쾌함도 깃들어 있는 작품이다.

 

7. 수집열
생각하는 돌이 인간에게 수집당하려 한다. 그 돌이 지구로 옮겨지는 동안 '디블'한다. 그 '디블'은 분열과 폭발, 그리고 여러개의 생각하는 돌로 재탄생한다. 물론 수집가가 어떻게 되었을지는...

 

8. 완만한 대왕들
SF보다는 우화에 가까운 이야기이다. 두 명의 대왕이 다스리는 왕국, 신하는 오로지 한 개의 로봇 뿐이다. 그런데 이들의 관점에서의 시간이란 무한히 길다는 게 함정. 새로운 신하로 삼기 위해 데려온 인류가 진화해서 핵전쟁 후 멸망하는 기간동안 이들은 고작 몇마디 대화를 나눌 뿐이다. 시간의 상대성을 재치있게 비틀어낸 작품.

 

9. 폭풍의 이순간
우주의 어느 위성도시. 지구와의 연락은 수년씩 걸리는지라 별개의 세계인 듯 살아가는 곳이다. 이곳에 역대급의 폭풍이 불어닥치면서 겪게 되는 이야기다. 재난물의 압축판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10. 특별 전시품
SF를 완전히 벗어난 풍자 소설이다. 박물관 안으로 들어가 철학을 하는 동상이 되고자 하는 어느 전위 예술가(?)의 이야기다. 이 전위 예술가가 같은 목적을 가지고 박물관에 잠입한 또다른 여성과 은퇴한 미술 평론가들을 만나는 이야기. 유쾌한 상상력이 재미있다.

 

11. 성스러운 광기
엄청나게 놀라운 작품. SF적인 영상미를 글로 표현한 작품 중 역사에 남을 만한 작품. 단언컨데, 앞으로 나올 그 어느 작가를 포함하더라도 이같이 완벽한 SF 영상을 글로 쓸 수는 없다. 시간의 전개와 리와인드를 다루고 있는데, 한 사대가 과거로 되돌아가 잘못된 선택을 정정하는 얘기다.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건 표현 방식인데,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시간의 역행을 표현하고 있다. 이건 글로 표현 할 수가 없다. 여기에 번역까지도 완벽한 수준이다.

 

12. 코리다
우주에서 투우의 대상이 되어버린 인간. 뉴욕 한복판에서 납치 당했고 우주 투우장의 제물이 된다.

 

13. 사랑은 허수
제목과 달리 신화를 배경으로 하는 무거운 작품이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를 SF적으로 재탄생시켰다.

하루 종일 내 옆에 묶여 있는 뱀이 내 얼굴을 향해 독액을 뱉고, 그녀는 곁에서 그것을 받기 위해 접시를 내민다. 그러나 접시가 가득차면 나를 배신한 여자는 그 내용물을 땅에 버려야 한다. 그때마다 뱀은 내 눈을 향해 독액을 뱉고, 나는 비명을 지른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자유를 되찾을 것이다. 오랫동안 괴로우에 시달려 온 인류를 나의 수많은 선물로 돕기 위해. 내가 이 속박에서 벗어나는 그날, 높은 하늘도 진동하리라.

 

14.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죽음에서 스스로 깨어날 수 있는 남자와 죽음을 앞둔 자만을 볼 수 있는 여인과의 사랑 이야기다. 로봇을 이용해 생명 유지장치를 스스로 껐다 켰다 하는 남자가 어느 외계 생명체 여인을 만나면서 사랑에 빠진다.

 

15. 루시퍼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는 분위기로 승부하는 인상주의 글이다. 모든 인류가 없는 황량한 도시. 한 남자가 스스로 이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으려 하고 이 도시는 정확히 93초간 작동한다. 거대하고 황량한 폐허문명을 느낄 수 있는 작품

93초였어! 나는 93초동안 너희들을 되살려 놓았단 말이다!

 

16. 프로스트와 베타
인간이 멸망하고도 살아남은 로봇들. 프로스트는 북반구를 지배하는 기계다. 어떤 오류로 인해 호기심이라는 기제가 작동했고 인간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한 기계가 스스로, 혹은 다른 로봇의 도움으로 인간으로 탄생하는 이야기. 인류의 기원. 역사의 반복. 기계적인 창조등의 아이디어가 혼재되어 있는 수작이다.

 

17.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사랑은 허수>와 비슷한 맥락의 작품. 아더왕의 전설에서 차용한 이야기로 신화의 재해석이라는 젤라즈니 후기의 느낌이 잘 녹아 있다. 마범의 힘으로 시대를 뛰어넘어 다시 전쟁을 시작하려는 마법사 멀린에 대항하는 기사 랜슬롯의 이야기다. 소년들의 로망을 잘 그려냈으며 이런 구조는 한국 판타지에서도 많이 차용되고 있다.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저자
로저 젤라즈니, 로 젤라즈니 지음
출판사
열린책들 | 2009-11-1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SF에 대한 기존 관념을 재검토하게 한 아메리칸 포스트뉴웨이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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