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6년에 중학생이면 몇살인건가. 중학생이 한 16살쯤 되니까 지금은 40대 중반에 접어들었겠다. 시대가 낳은 이야기꾼 정유정의 초기작인 이 작품은 지금은 장년이 되었을 한 소년의 성장 이야기다. <7년의 밤>이나 <28>에서 보여준 강렬함과 날카로운 펜이 가다듬어지기 전의 정유정을 보여주는 좋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유쾌하고 호기 넘치며, 쉴틈없이 달려간다. 궂이 비슷한 예를 찾아 보라면 일본의 오쿠타 히데오나 가네시로 가즈키 정도가 떠오르지만 암만 생각해도 정유정 작가가 한수 위다. 번역이라는 거름망을 거쳤다는 걸 감안하고라도 말이지.
제목만 봐도 대충의 느낌은 온다. 내 인생의 스프링캠프. 지금의 나를 키웠던 어린 시절의 어떤 일. 사건. 올해 열 다섯이 된 준호는 우연찮게 가장 친한 친구 규환의 심부름을 하게 된다. 광주민주화운동에서 6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간. 반정부투쟁중인 규환의 형이 외국으로 도피할 자금과 서류를 목포까지 운반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맡은 것. 다가올 모험에 소년다운 두근거림은 출발과 동시에 박살난다. 무려 3명, 개까지 넷의 혹이 따라 붙은거다. 양조장의 3대독자이지만 지나친 보살핌에 절에 갇혔다가 탈출한 동급생 차승주, 공부는 전교 1등이지만 술주정뱅이 아빠의 폭력을 피해 차에 올라탄 정아. 그리고 정아네 사냥개 루즈벨트. 마지막으로 알 수 없는 기이한 노인 한명이 일행이 되어 버린거다. 사이좋게나마 가면 모르겠지만 거의 웬수들끼리 여행하는 느낌이다. 목적을 알려주지 않는 할아버지, 서로를 믿지 못하고 티격대는 승주와 준호. 속을 알 수 없는 정아까지. 제일 하이라이트는 제어불능인 루즈벨트다. 그냥 시끄러운 정도가 아니라 주인을 공격할 정도이니 이만하면 적과의 여행보다 더하지 않은가.
이 소설의 핵심은 여행의 과정이다. 차편을 잃어버리고 걷고, 개 때문에 차를 못잡아타는 와중에 승주네 부모가 유괴신고까지 해 버린다. 동행한 할아버지가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것 까지 수면 위로 드러나면서 영화 못지 않은 로드트립이 펼쳐진다. 경찰에 붙잡히고, 군인에 쫒기고. 마냥 웃을 수만도 없는 것이 실수 투성이의 유쾌한 여행 배경에는 80년대의 우울한 시대상이 비춰지고 있어서다.
소설의 하이라이트. 과연 규환의 형에게 무사히 물건을 전달할 수 있을까. 아니, 전달한 그 다음에 이들은 어떻게 될 건가. 그런 것들도 중요하지만 이 소설의 진자배기는 고래다. 갑자기 웬 고래냐고? 시종일관 동일한 톤으로 진행하던 소설에 유일한 균열이 이 장면이다. 현실적인 배경과 오버스러운 유쾌함으로 일관하던 이야기가 고래의 등장과 함께 무너진다. 그런데 이상하거나 난데 없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오히려 고래를 직접 바라 보는 것처럼 생생한 새벽녁의 몽환이 떠오른다. 그리고 소설 속의 아침을 맞게 되면 주인공과 똑같이 꿈을 꾼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어느 순간, 그들은 바다를 박차고 날아올랐다. 하나, 둘, 셋....... 차례차례 내 심장으로 들어왔다. 모두 들어왔다. 그사이 세상은 멈춰있었다. 바람과 파도, 대기의 움직임과 시간, 모든 것이 멈췄다. 나 자신의 존재감마저 잊었다. 절벽의 한 부분인 양 미동도 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 약속한 듯이 그랬다. 어쩌면 말을 하거나 움직여서 우리 안으로 막 들어온 그들을 놀라게 할까 두려웠다.
결과적으로 임무는 완수하지만, 고래가 가슴 속으로 들어왔지만, 준호의 인생은 변화가 없다고 생각된다. 아니, 실제로는 변화가 있을 런지도 모른다. 그 고래가 없었다면 3대독자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운동권에 뛰어들지도 않았을테고 고래를 연구한답시고 세종기지로 가지도 않았을꺼다. 준호 역시 소설가가 될 생각을 안했을지도 모른다. 연락이 끊어진 정아는... 어쨌든 정아도 무언가 다른 삶을 살고는 있을꺼다. 짧고 강렬한 스프링캠프가 가상의 네명. 이 책을 읽는 동안 나와 가장 가까웠던 네 명의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이들은 고래를 품고 살아가고 있나보다. 내 고래는 어디에 있는 걸까. 가슴에 품어볼 생각도 못한 채 봄이 지나간건 아닌가 싶어서 스스로가 불쌍하다.
PS. 월향도에 가보고 싶다. 신안 정도면 비슷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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