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634

뻐꾸기, 날다: 할 말은 많지만 말하지 못하는

출판 경력이 꽤 되는 중견 작가여서 어느 정도는 읽을 만하겠다 싶었는데, 실망이 더 크다. 수많은 등장인물과 복잡한 서사를 곳곳에 배치하고 있지만 이야기는 하나의 축을 형성하지 못하고 빙글빙글 돈다. 원래의 의도는 정치판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복수극을 통해 돌고도는 먹이사슬의 잔혹함을 그려 내고 싶었던 것 같기는 한데 실력이 의도를 넘지 못했다. 정교한 먹이사슬보다 할말은 많은데 표현이 어려운 아이의 진부한 이야기처럼 지루했다. 팩트 위에 쌓아 올린 세부적인 픽션이 그나마 끝까지 읽는 원동력이 되기는 하지만 정작 등장인물의 심리변화는 설명하지 못한다. 그래도 사전 조사만큼은 끈질기게 했는지 소재의 디테일은 꽤 뛰어난 편.

공간이 만든 공간 : 유튜브 채널의 확장판

솔직히 말하면 조금 실망했다. 일단은 유튜브의 재기 발랄함과 친절함이 텍스트에서는 딱딱하게 표현됐을 뿐 아니라 많은 내용이 채널에서 소개됐던 내용 위주라 신선함도 떨어졌다. 물론 유튜브라는 것도 작가의 기존 생각이 축약되고 정제되어 보여지는 모습이니 콘텐츠가 비슷한 건 어쩔 수 없다지만 아쉬움은 있다. 공간이 만든 공간에서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건축이 발달하는 필연적 과정을 다루고 있지만 많은 부분에서 제레드 다이아몬드와 같은 거장의 생각을 차용하고 있어 새로움이 많이 떨어진다. 특히 유현준 건축가는 지리적 차이에 따른 건축 양식의 차이를 동서양으로 나누어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데 이 부분에서 너무 많은 부분들이 기존 그의 주장의 되돌이표 같은 느낌이다. 지리적 차이가 낳은 역사적 배경, 그 배경에서 ..

사소한 변화 : 뇌의 일부가 바뀌었을 때 그 사람은 온전히 그 사람일까.

스릴러 거장의 초창기 작품 중 하나다. 뇌의 일부를 이식한 사람이 점점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는 다소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고, 그 배경이 늙어가는 권력자들을 위한 실험의 일부라는 설정은 지금 관점에서 좀 유치한 면이 있다. 하지만 반전과 사건에 집중하는 다른 작가들과 달리 히가시노 게이고는 캐릭터의 심정적인 변화에 집중한다. 그래서 이 뻔한 스토리가 사람을 끌어들이게 만든다. 이제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내 안의 무언가 분명히 예전의 내가 아니다. 지금의 나는 대체 누구인가? 주인공 준이치는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이고 아주 온순한 사람이다 우연찮게 강도로부터 어린아이를 지키다 뇌에 총을 맞지만 다행히 뇌 이식 수술을 통해 목숨을 건진다.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점점 준이치는 난폭하고 세상에 적대적인 남자가 되..

대한민국은 왜? - 미국은 왜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했을까

이 책은 격동의 대한민국 탄생부터 현재까지 풀리지 않고 있는 친일의 굴레에 이르기까지를 국제정세에 비추어 원인을 치밀하게 파헤친다. 최근 윤대통령의 일본 외교 문제가 친일로 비화되고 있는데 이 책을 읽어 보면 그들이 어떤 정신적 맥락에서 그런 선택을 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먼저 미국은 다 이긴 전쟁의 종반에 굳이 일본에 원자탄을 떨어트렸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는 소련에 대한 외교적 경고라고 김동춘 박사는 이야기한다. 2차 대전이 어느 정도 승리로 기울고 있는 시점에서 미국은 우군이면서 이념적으로 다른 길을 걷고 있는 소련과 전쟁이 이어질까 두려웠고 원자탄이라는 강력한 경고장을 보내게 되었다. 그 정도로 미국은 공산주의의 확대를 경계했고 동방의 작은 나라의 독립 문제는 큰 고민이 아니었던 것이다. 오..

한반도 평화 오디세이 - 지루한 통일 담론

대한민국의 금수저들을 일렬종대로 세운다고 해도 상위 100명 안에는 들어갈 사람이 바로 이 홍석현 회장이다. 중앙일보와 JTBC의 회장에 이어 주미대사까지 지낸 인물이라 재벌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선출직이 아닌 주요 공직을 경험한 사람이 아닐까 싶다. 보통의 재벌이라면 임명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검증 과정과 잡음이 불편할 수밖에 없기에 공직에 대한 꿈을 가지지 않기 마련인데 이 분은 특이하게도 꾸준하게 공적 사업에 관심을 보인다. 능력은 둘째치고 관심만큼은 진짜라 여겨진다. 특히 대북사업과 통일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는데 관련한 재단 운영과 저서를 꾸준히 내오면서 거대 담론을 제시한다. 보수 언론의 수장으로 오랜 시간을 보낸 만큼 편향적인 시각을 보이지는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아서 조금 의외다..

7번 국도 Revisited – 비틀즈의 미발표곡 route 7처럼

그런 건 없다. 비틀즈의 미발표곡 중Route7이라는 곡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김연수는 소설의 마지막에 이를 밝혔는데 그 내용이 특이하다. 여기에 나오는 비틀즈의 싱글은 제가 아무리 찾아봤지만 이 세상에는 없었습니다. 혹시 구하느라 시간을 허비하지 마시길. 도대체 있다는지, 있었다는 건지 모호한 문장이다. 7번 국도는 그런 소설이다. 작가의 젊은 시절의 인상주의 풍의 그림처럼 관념적으로 다루고 있다. 완전한 망각이란, 사랑 안에서, 가장 순수한 형태의 보존. 그러니 이 완전한 망각 속에서, 아름다워라. 그 시절들. 잊혀졌으므로 영원히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기억의 선사시대. 이제 우리에게는 그 시절의 눈이 없지. 그 시절의 귀와 입과 코가 없지. 스무살의 눈으로 바라본다면, 너무나 끔찍한 얼..

나는 정말 너를 사랑하는 걸까? - 해결책 없는 관계의 불안

사랑이라는 감정은 젊은이들에게는 맹목적인 환상을, 나이가 든 사람에게는 불투명한 관념으로 비친다.. 사랑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본성이 이기심과 어우러져서 매번 다른 모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사랑을 맹목적으로 규정하고 정의하며 설명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것이 정신분석학적인 접근을 할 수는 있을 거다..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불안한 감정을 과하게 지니고 있는 소수의 사람을 다루고 있다. 마음의 병 수준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도 많은 일반인들은 이 책에서 사랑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아마도 누구나 가지는 젊은 시절의 불안과 불확신에 무척이나 도움을 받고 싶었나 보다.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결여된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들은 이상화한 관계의 전..

개별적 자아 – 봉태규의 수다

봉태규는 유명 배우다. 81년생으로 나와는 고작 1살 차이이지만 내가 한창 군대에서 뺑이를 치던 22천 년에 그는 데뷔했고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작품운은 없어서 스타가 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활동에 비해 ‘잘하는 배우’라는 수식어는 꾸준히 지켜내 왔고 작년에 와서야 로 빛을 받았다. 서태지를 좋아하는 점을 빼고는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글 속의 인간 봉태규는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적어도 갓 아빠가 된 봉태규는 이 에세이를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쪼잔함, 경박함, 두려움, 무탈한 삶에 대한 감사를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무탈하게 학교를 나오고 꽤 괜찮은 직장에 근무하면서도 언제 끝장이 날지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한편에 자리 잡고 있는 40대 남성이라면 누구나 저런 고민들에 동질감..

미친 포로원정대 – 미래의 고통까지 잊을 수 있는 도전

이것은 실화다. 1938년 이탈리아는 무솔리니 체제 안에서 전 세계와 전쟁을 벌이고 있었고 펠리체 베누치는 에티오피아에서 영국군의 포로가 되어 케냐산이 보이는 수용소에 갇히게 된다. 그곳에서의 끝없는 무료한 생활에서 베누치는 탈출하여 해발 5천 2백미터의 케냐산을 등정하는 계획을 세운다. 산을 넘어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정상을 밟고 다시 돌아오겠다는 미친 계획을. 하지만 이름을 알 수 없는 포로여, 당신은 죄를 짓고 감옥에 갇힌 자와 전쟁 포로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모르는가? 전자는 그 형량이 얼마나 되건 자유의 몸이 될 정확한 날짜를 안다. 반면에 우리는 그렇지가 않다. 이놈의 전쟁이 얼마나 더 지속될지, 우리가 받은 형기가 얼마나 더 연장이 될지를 정확히 예측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

‘확신의 덫’ - 중요한 건 자신의 불완전함을 믿는 것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지만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열심히 일을 잘해오던 사람이 승진을 하고 리더 직급이 되면 전혀 딴 사람이 되는 걸 본 적이 있다. 나도 그랬고. 분명, 일을 잘 하는 것과 잘하게 만드는 것은 큰 차이를 가진다. 그것이 어려우면서도 중요하기 때문에 이 세상은 리더십과 성과관리 서적이 넘쳐나는 거고. 저자는 400여쪽에 달하는 글을 통해 상사의 노력대로 팀이 굴러가지 않는 원인을 분석했고 나름의 해결책도 제시했다. 안타깝게도 도깨비방망이 같은 해결법은 없다. 그 대신 서로가 이해하기 위해 더욱더 노력할 것이라는 주문을 해 온다. 그저 내 마음을 왜 몰라줄까 하는 생각 이면에 있는 은근한 무시, 경쟁, 두려움을 인정하고 있는 그대로 서로에게 마음을 열 때 온전한 리더십이 발휘된다. 가장 중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