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백치 - 도스토예프스키] 니힐리스트-기성관념 융합 실험의 실패

슬슬살살 2016. 5. 15. 12:44

1. 왜 <백치>인가
일반적인 의미의 '백치'는 이 소설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순수하고 깨끗한 어린아이 같은 '공작'이 나올 뿐이다. 백치처럼 순수한 공작이 러시아 상류사회 한복판에서 겪는 애정과 금전, 명예에 관한 혼란을 그리고 있다. 러시아어로 수도승을 의미하는 '유로지비'라는 말이 있다. 세속적인  미치광이 행세를 하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 수도자나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치이면서도 예언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믿었으며, '바보 성자'라고도 했다. <백치>의 주인공인 '공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이 <백치>를 집필한 동기는 진정 아름다운 사람을 그리기 위함이었다. 그의 성격의 바탕을 이루는 것은 단순하고 고결한 정신, 무한한 사랑의 요구, 모든 악감정에 대한 무지, 남을 신뢰하는 어린아이 같은 솔직한 마음, 남의 고통에 대한 본능적인 직관력, 천진난만한 아이에게만 허락되는 인간 영혼을 꿰뚫는 투시력이다.

 

2. 러시아를 대표하는 인간 군상
'공작'을 제외한 수많은 등장인물은 모두 러시아의 민낯을 상징한다. 혁명 직후의 러시아는 급작스레 성장한 시민계급, 금전주의,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허무주의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는 혼란 사회였다. 자존심 그 자체인 '나스타샤', 과거의 영화에 매달려있는 은퇴군인 '이볼긴', 자존심과 금전 사이에서 갈등하는 '가브릴라', 논리적 허무주의에 휩싸인 시한부 '이뽈리드'까지. 모두가 일반적이면서도 각각 러시아의 한 모습들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이 인물들 사이에서 '공작'은 다시 백치가 되어간다.

 

공작도 이미 느끼셨겠지만, 모두 사기꾼들이에요! 다름 아닌 우리 러시아, 우리의 사랑스런 조국에 사는 사람들이 그렇단 말이빈다. 도대체 어떻게 이헌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옛날에는 기반이 아주 견고했다고 생각되는데 지금은 어떤가요? 모두들 거기에 대해 말하고 글을 쓰고 있어요. 폭로를 하는거지요. 우리 나라에서는 모두들 폭로를 일삼으니까요. 부모들이 제일 먼저 뒤로 물러나서 자기네들이 내세우던 옛날의 도덕을 부끄러워 하고 있는 형편이에요.

 

3. 줄거리
1부는 나스타샤의 이야기다. 나스타샤는 <백치>에서 가장 중요한 여인으로 아름다운 창녀다. 로고진과 가브릴라의 마음을 훔치고는 그들을 조롱한다. 공작을 사랑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공작을 파멸시킬 것이라 생각하고 오히려 잔인하게 그들을 대한다. 결국 모든 관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로고진이 바친 10만 루블을 불속에 넣고 가브릴라를 조롱한다. 로고진과 함께 모스크바로 떠난다.

 

좋아요, 그럼 가브릴라, 잘 들어봐요. 마지막으로 당신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 싶군요. 당신은 3개월 내내 나를 괴롭혀 왔으니까 이번엔 내 차례에요. 이 보따리가 보이지요? 여기에 10만 루블이 들어 있어요! 내가 이걸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벽난로의 불구덩이 속으로 던져 버리겠어요. 모두가 증인이에요! 이 돈 보따리가 화염에 싸이는 순간 벽난로 속으로 손을 넣는 거에요. 그러나 장갑을 끼면 안되요, 맨손이어야 해요. 소매를 걷고 불속에서 돈뭉치를 끄집어내는 거에요! 그걸 다 끌어내면 이 10만 루블은 모두 당신 것이 되는 거에요! 손가락에 화상을 좀 입는 대신 10만 루블을 얻을 수 있는 기회니 잘 생각해 봐요! 꺼내는 데 그렇게 시간은 안걸료여. 나는 당신이 내 돈을 꺼내려고 불 속에 손을 넣는 꼴을 보고 싶어요. 여기 있는 모두가 증인이니까, 이 돈뭉치는 당신 것이 되는 거에요. 만약 손을 넣지 않는다면 돈은 그대로 타버리는 거라고요. 다른 사람은 완돼요, 저리 가세요! 모두들 비켜 서라고요! 내 돈이에요! 하룻밤 사이에 로고진에게서 받은 내 돈이에요, 정말 이건 내 거지요, 로고진?

 

2부는 부르도프스키와 이뽈리드가 등장한다. 1부까지의 공작이 순수한 어린아이 같았다면 2부에서는 각 사건의 이해관계자로 등장한다. 처음 공작의 순수함에 가까워졌던 인물들이 공작을 혼란에 빠뜨린다. 특히 공작의 후원자였던 P의 아들 부르도프스키의 등장으로 공작의 도덕성이 위협 받는다.

 

당신은 부르도프스키 문제에 관해 자신이 옳다고 생각합니까?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당신은 빠블리쉬체프에게서 은혜를 입고, 하마트면 죽을 뻔 했던 처지에서 구원받았다는 것을 인정합니까? 만약 인정한다면(분명 인정하겠지만), 이미 수백만 루블을 물려받은 자로서 빠블리쉬체프의 궁핍한 아들에게 고인에 대한 은혜를 갚을 생각이 있습니까? 비록 부르도프스키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

 

마지막 3부에서는 이뽈리드가 자살 소동을 벌이고, 이볼긴 장군은 치매에 걸린다. 로고진은 결국 나스타샤를 살해하고 공작은 다시 '백치'가 된다.

 

살인자는 완전히 의식을 잃고 열병을 앓고 있었다. 공작은 꼼짝 않고 조용히 옆에 앉아서, 환자의 비명 소리와 헛소리가 터져 나올 때마다 떨리는 손을 황급히 뻗어 그의 머리와 뺨을 어루만져 달래듯이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공작은 사람들이 물어보는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방으로 들어와 그를 에워 싼 사람들을 알아 볼 수 조차 없었다. 만약 슈나이더 교수가 스위스에서 찾아와 예전의 제자이자 환자인 공작을 보면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손을 내저으면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백치다'!

 

4. 더듬 더듬, 관념의 산책
읽는 게 쉽지만은 않다. 일단 러시아 특유의 길고 긴 이름이 상당한 장애가 된다. 여기에 도스토예프스키의 특징인 확장성이 결합되면 메인 이야기를 따라 잡는게 어렵다. 상당히 집중해서 읽어야 흐름을 놓치지 않고 중요한 것과 부속 이야기가 구분이 된다. 일종의 연극 시나리오처럼. 실제로 극적인 장면들은 모두 연극의 한 무대처럼 감정이 과잉된 상태에서 과장된 기법을 활용하고 있다. 또한 <백치>는 스토리 라인을 따라가는 소설 보다 관념의 이동, 관념과 관념 사이의 방황 같은 글이다. 글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단어중에 하나가 니힐리스트다. 투덜거리는 허무주의자 정도가 적당한 느낌인데, 극중 많은 젊은이들이 니힐리스트이다. 기성세대라 할 수 있는 이볼긴 장군, 구세대의 산물인 나스따샤 같은 이들 사이에서 결국 가치관이 침몰해 버리고 독설만 남은 이뽈리드가 탄생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공작'이라는 존재를 통해서 융합과 화해라는 실험을 시도 했지만 결과는 모두가 아는 바와 같다. '공작'은 백치가 되었고 실험은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