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최서해 단편선: 탈출기 외] 1920년, 그 비참했던 민중의 빈곤

슬슬살살 2016. 5. 26. 21:40

해방 후 북한을 선택한 작가들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진 건 생각보다 오래지 않았다. 겨우 2천년대 초반에 와서야 문학성 있는 작품들이 조금씩 소개되기 시작했을 뿐. 만주에서 극빈한 민족의 실상을 글로 그려 낸 최서해의 작품도 마찬가지다. 사실, 최서해의 작품들은 제한된 소재와 자기 복제가 많아 뛰어난 문학적 성취를 보았다, 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다. 문장의 표현 이야기의 전개구조 역시 관행적인 수준에서 크게 빗겨가지 않는다. 다만, 다양한 어휘는 '객주'처럼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 그럼에도 최서해의 작품에는 '시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시의 대다수의 인텔리들은 암울한 시대에 기대어 퇴폐와 허무주의로 기울어 있었다. 최서해의 작품들은 이런 사조를 따르지 않고 본인이 직접 보고 겪은 가난, 궁핍, 기아 빈곤을 다루고 있다. 작가가 직접 체험한 소재들인 만큼 그의 모든 작품에 펼쳐지는 빈곤은 그 어떤 작품보다 가난하고 슬프다.

 

나무껍질을 벗겨먹는 것은 예사고 최소한의 인간적인 선택조차 할 수 없던 가난한 민중. 최서해는 그 빈궁을 고스란히 원고지로 옮겼다. 그 빈곤의 중심에는 일본인 지주, 만주의 중국인들, 같은 조선인 지주들이 있다. 당연히 사회주의적인 사상이 한글자 한글자에 배어나온다. 사실, 그정도로 배가 고플 때 '왜 내가 배고파야 하는가'라는 의문은 누구라도 들 터, 당시 민중 사이에 있던 지식인들이 사회주의를 받아 들인 건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부지런하다면 이때 우리처럼 부지런함이 어디 있으며 정직하다면 이때 우리 식구같이 정직함이 어디 있으랴? 그러나 빈곤은 날로 심하였다. 이틀 사흘 굶은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한 번은 이틀이나 굶고 일자리를 찾다가 집으로 들어가니 부엌 앞에 앉았던 아내가 (아내는 이때에 아이를 배서 배가 남산만 하였다) 무엇을 먹다가 깜짝 놀란다. 그리고 손에 쥐었던 것을 얼른 아궁이에 집어 넣는다. 이때 불쾌한 감정이 내 가슴에 떠올랐다.

 


"무얼 먹을까? 어디서 무엇을 얻었을까? 무엇이길래 어머니와 나 몰래 먹누? 아! 예편네란 그런 것이로구나! 아니 그러나 설마...... 그래도 무엇을 먹던데 (-----탈출기 中 )

 

탈출기에 나오는 이 한 장면 안에는 배고픔으로 갈라져 가는 가족을 구슬프게 그리고 있다. (사실 저 아내는 귤껍질을 주워먹고 있었다) 결코 가난한 가족은 행복할 수 없다. 지나친 배고픔은 인성을 파괴한다. 최서해의 소설에서 빠짐 없이 등장하는 빈곤은 민중을 옥죄고 있고 그들은 상대방을 파괴하거나 나 자신을 부순다. 가족을 버리고 독립운동,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경우도 있다. 그 어느 선택지건 주인공의 가정은 파괴당한다.

 

이 일방적이고 반복적인 단편들에서 느껴지는 불편함은 극복하기 어렵다. 이렇게 적나라한 가난 속에서 기껏 떠올릴 수 있는 건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 때 태어났으면 어쩔뻔 했어)정도의 일차원 적인 안도감 뿐이다. 그정도로 무섭다. 기아가 얼마나 무서운지 경험하고 싶다면 이 책을 읽을 것. 그렇지만 소재와 구성이 단편들마다 자기복제가 이루어져서 모든 작품을 찾아 읽을 필요 까지는 없는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