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파커가 활동하던 시기는 하드보일드의 인기가 시들해지고 이른바 두뇌파 탐정들이 추리 소설의 1진으로 부상하던 시기다. 근육질의 하드한 탐정들의 자리를 레밍턴 스틸 같은 야들야들한 주인공들이 채우던 시절. 파커가 만들어낸 스펜서는 그래서 독특하고 독보적이다.
그는 현대에 살며 기사도라는 서구의 전통을 계승하는 인간이다. 그는 무엇에도 굴하지 않으며 무리를 짓지 않는 외로운 늑대이다. 위험을 무릅쓰는 것은 혼자말과도 같은 의지의 표시이다. 그는 독자적 도덕률에 기반을 두고 다른 어떠한 통념도 그 도덕률에 비추어 이해하고 판단한다. 그는 늘 이 사회에 있어서의 최후의 신사이며, 신사로 남기 위해서는 투쟁을 벌일 때도 자주 있다. 때로는 사람을 죽여야 하는 경우에도 직면한다.
대표적인 하드보일드 탐정, 샘 스페이드1가 근육질의 난폭한 마초였다면 스펜서는 대학까지 나온 두뇌파 로맨티스트이다. 거친 면도 있지만 기본적인 베이스는 엘리트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악당의 반대편에 서 있는 정의감에 불타는 신사. 스펜서는 그런 남자다.
작중 스펜서의 대사로 그가 얼마나 올곶은 길을 걷는지를 보여준다. 요즘 눈으로 보면 조금 오글거릴 수도 있겠지만 이것저것 재지 않고 본인이 옳다는 바를 행하는 자. 어벤져스가 떠오르는게 우연은 아닐터. 미국식 영웅, 리더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약속의 땅>은 양성평등, 페미니즘을 다루고 있다. 불과 몇 달 전 강남역 인근에서 있었던 안타까운 사건이 있었고 '여성혐오'라는 아젠다를 사회에 던졌다. 아이러니하게도 50여년 전의 이 소설이 다루고 있는 부분도 그 부분이다.
집을 나간 부인을 찾아달라는 단순한 의뢰. 스펜서는 부인을 찾지만 이것이 범죄가 아닌 부인 스스로 나갔다는 점에서 팸 스펜서2의 위치를 의뢰인에게 말하지 않는다. 팸은 조금 극단적인 여성운동을 하는 제인과 로즈와 함께 지내면서 반 수동적으로 지하조직에 가입한다. 이들은 총을 구하기 위해 은행을 털고 그 과정에서 죄없는 경비원 노인을 죽인다. 그리고는 죄책감 없이 괜히 끼어들은 노인의 잘못으로 미룬다. 극단적인 운동가의 편협한 시선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한가보다. 팸 부인은 뒤늦게야 빠져나오려 하지만 이미 살인의 종범으로 묶인 상황. 스펜서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편, 의뢰인인 스펜서 역시 '약속의 땅'3이라는 개발 프로젝트를 위해 사채를 끌어 썼다가 파산할 위협에 몰린다.
정의감에 불타는 스펜서가 아무 이득 없이 두 명의 평범한 가족을 돕는 방식이 인상적이다. 특히나 양측이 처한 상황을 한꺼번에 풀어내는 모습은 탐정보다 해결사에 가깝다. 정의감에 불타는 멋진 탐정이 약간의 액션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모습이 어찌 멋지지 않을까. 특히나 오랜시간 알고 지낸 악당 '호크'를 돕는 모습은 '기사' 그 자체다. 멋지다. 스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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