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폐쇄 구역, 서울 - 정명섭] 좀비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슬슬살살 2016. 6. 13. 21:28

4.4 사태
2011년 4월 4일. 김정일의 사망과 동시에 혼란스러워진 한반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각자의 이익을 취하려는 열강들의 묵인 아래 서울과 평양에는 각각 핵이 떨어진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으니, 서울에서 피폭된 이들이 좀비로 되살아 났다. 수많은 점령 작전이 펼쳐지지만 결국 서울은 3m 장벽으로 둘러 쌓인채 폐쇄되었다.

 

핵폭발은 좀비를 만들어내면서 사람들에게서 다른 것들을 빼앗아갔습니다. 그때 없어진 게 뭔 줄 아십니까? 명함에 찍혀있는 회사나 직책, 월급봉투, 대학 졸업장 같은 겁니다. 그리고 그런 허물들이 벗겨지면서 사람들은 더 끔찍해졌습니다. 이제 남은 건 먹고 사는 것뿐이지요. 사람들은 천박하고 비겁해졌습니다. 남편이 아내를 버리고 부모가 아이들을 버린게 지극히 정상적인 게 되어 버렸습니다. 핵폭탄이 진짜 날려 버린 건 인간성입니다. 우린 어쩌면 폐쇄 구역을 떠도는 좀비들보다 더 하등 동물이 된 건지도 모릅니다.

 

트레져 헌터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어떻게든 꾸역꾸역 사람들이 살아 나간다. 개중 폐쇄 구역을 드나드는 직업도 생겼으니 트레져 헌터다. 좀비 천지로 변한 그 지옥 같은 곳에서 의뢰인이 요구하는 것들을 찾아 오는 것. 예를 들면 내 재산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나 중요한 문서, 가족사진 같은 추억의 물건 따위다. 전자는 고액의, 후자는 싸구려 일감. 탈북자 출신인 늑대의 밑에서 트레져 헌터 일을 하고 있는 현준은 잠시 자질구레한 일들을 맡으라는 지시에 가족의 물건들을 찾아오는 일들을 하게 된다. 그들의 절절한 사연 속에서 점차 잃어버린 인간성이 돌아온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한창 폐쇄구역을 뒤지던 현준이 살아있는 인간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꼬인다. 누군가 그 안에서 살아남아 있고 심지어 트레져 헌터들을 공격해 오기까지 하고 있다. 과거 한 기독교 분파 하나가 신의 섭리에 따른다며 남아있었다는데 그들이 10여년간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얼까. 그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은 무엇인가.

 

화학무기와 쿠데타
사실 폐쇄 구역을 놓고 군부 내에서 반란 세력이 있었다. 폐쇄 구역을 유지하겠다는 명분 아래 강력한 군부국가가 되어버린 한국과 쿠데타를 일으키려는 세력. 마침 폐쇄구역 안에는 이 협상을 가능케 할 수준의 화학 무기가 있었고 쿠데타 세력이 이를 되찾아오고자 했던 것. 권력 다툼 속에서 현준은 진짜 인간다움에 대해 성찰한다. 또다른 전쟁을 막기 위한 현준과 그 배후에 있었던 늑대의 대결이 막판까지 뜨겁다.

 

한국에서 보기 힘든 좀비물
월드워Z  이후 좀비라는 소재는 훌륭한 하나의 문학 장르로 자리매김했다. 다만 그 정서나 분위기가 서양 위주로 돌아가다 보니 한국과는 왠지 맞지 않게 느껴진 것도 사실. 좀비물이라는게 인간의 욕심, 거대 제약기업 혹은 군수기업, 세계구급 멸망과 인간의 대응을 담아내야 한다는 점도 한계였다. 그럼에도 <폐쇄구역, 서울>은 상당한 수작이다. 좀비의 원인과 해결을 담는 대신 서울이라는 범위로 한정지어 놓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으니. 거시적인 접근 보다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세히 담기에 좋은 설정인데다 개개별 에피소드도 살아 있는 듯 하다. 군부 쿠데타, 기독교적인 저항도 한국이라는 지역에 적함한 소재였고. 위정자, 또는 거대한 권력과의 다툼이 아닌 그 안에서의 작은 다툼 중심으로 국한시키면서 이야기는 디테일해 졌고 쫒고 쫒기는 액션 씬도 끈덕질 수 있었다. 물론, 방사능 같은 설정오류가 곳곳에 있기는 했지만 굳이 신경쓸 정도까지는 아니다. 척박한 한국 장르 문학계에서 한 권으로 압축한 긴박한 이야기를 뽑아낸 정명섭 작가는 조금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