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삼매경

[나에게 오라] 한국전쟁 키즈의 아련한 성장통

슬슬살살 2017. 3. 17. 10:42

영화라는 매체는 아웃풋이 영상을 통해 나오게 되어 있다. 그 결과물이 참신한 아이디어, 현란한 볼거리로 중무장할 수도 있지만 과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재현함으로서 즐거움을 주기도 한다. <나에게 오라>는 20년 전의 작품이면서 60년대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기에 당시의 정서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거칠기는 하지만 사실적으로 표현한 당시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진짜 그 시대의 작은 소마을로 들어간 기분이 든다. 영화는 대한민국에서도 외진 한 시골마을, 그 시골에서도 아웃사이더로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최민수, 김정현, 박상민 같은 연기자들의 젊은 모습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잠깐이지만 홍경인의 젊은 모습도 반갑다. 


주머니칼 하나로 으스대고 돌아다니지만 결코 밉지 않은 꼬맹이 건달 춘근(박상민)과 사생아의 손가락질을 견디지 못하고 낙향한 윤호(김정현)이 어울려 다니는 모습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춘근과 어울리며 삥이나 뜻는 동네 건달이 된 윤호는 처음에는 순진한 모습을 보이지만 점차 이 생활에 적응해 나간다. 미래가 없이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보내는 삶. 영화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무력함이다. 동네 아이들의 삥을 뜯고 하릴없는 청년들이 모여서 술이나 퍼마시는 가난한 소도시의 모습은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도시와는 또다른 모습이다. 결코 아름답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쨌거나 저것도 삶이다. 소외된 인간들이 큰 무력함 속에서 꾸역꾸역 사랑하고 보듬고 살아가는 모습. <나에게 오라>는 그걸 담고 있다. 



그래서 정석(최민수)의 등장은 작은 희망이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후까시 가득한 동네 건달이지만 나름 지역의 큰형님 역할을 자처한다. 흰 한복을 입고 난초를 닦으면서 강렬한 눈빛으로 멋진 말을 내뱉는 그를 동네 청년들은 따른다. 그러나 그 역시 우물안 개구리일 뿐, 국회의원을 꿈꾸는 갑수와 대립하지만 결국 불구의 몸이 된다. 초연하게 받아 들이기는 하지만 너무나 어처구니 없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모습에서 작은 희망조차 떨궈진다. 갑수에게 원정을 떠나는 정석과 패거리가 마을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은 현대의 깡패 영화에 길들여진 눈에는 너무나 이상하게 보인다. 


영화의 또 다른 재미는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와 욕설. 지금이야 영화에서의 욕이 자연스럽지만 당시에서는 파격적인 대화다. 놈과 년이 난무하는 걸쭉한 사투리는 상업적인 재미가 아니라 사실성을 더해준다. 거칠게 살아간 당시 청년들이 지금처럼 매꼼한 말투를 가지진 않았겠지. 또 하나 유념해야 할 점은 아버지의 부재다. 이 영화에서 아버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비 역할을 하는 건 큰 건달 정석이고 그 또한 불구의 몸이 된다. 한국전쟁때 태어난 이들에게 아버지의 부재는 너무나 당연하면서도 콤플렉스로 자리매김한다. 아비없는 자식으로 태어나 열 아홉에 다시 아비를 잃는 처연함이 <나에게 오라>가 던지는 시대상이다.


열 아홉에 이 과정을 지켜본 윤호가 성장해 되새기는 이 이야기는 누구보다 강력한 성장통을 겪은이가 내뱉는 한탄이 아닐까. 심지어 그 고통스러운 순간까지도 세월이 지나가면 아련한 추억이 된다는 사실은 무얼 의미하는 걸까.


그때 열아홉 무렵은 얼마나 넘기 힘든 강이었나. 하지만 돌이켜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 슬픔이었나.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아련하고 눈부신 그 어린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