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국산책 2] 질문하고 싶다. 브라이슨처럼

슬슬살살 2018. 9. 9. 10:44

여행은 이미지로 시작해서 이미지로 끝난다. 실제 여행하는 기간은 찰나이지만 여행 계획에서 세운 이미지, 돌아와서 생각하는 이미지는 영원히 남는다. 유명한 곳일 수록 더욱 그런 경향이 있는데 이를테면 경주의 불국사나, 제주의 섭지코지 같은 곳들은 정형화 된 이미지가 있다. 빌 브라이슨 영국횡단의 시작점, 세븐 시스터즈가 그렇다.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오래지 않아 구릉 저편으로 압도적인 풍경이 펼쳐졌다. 아마 거의 모든 이들이 그 풍경을 보면서 '내가 전에 이곳에 왔던 적이 있었나?'하고 생각해볼 만큼 익숙하게 느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랭크 뉴볼드라고 하는 예술가가 이 풍경을 포스터로 그려 영원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한 차례의 영국 여행기를 책으로 펴낸 후에 브라이슨은 영국을 돌아다닐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다 영국을 횡단하는 가장 긴 거리, 세븐 스프링스와 보그너레지스 구간을 여행하기로 한다. 수많은 여행기 중 브라이슨의 에세이가 뛰어난 건 투덜거리며 여행하는 모습 속에 깊이 있는 통찰과 정보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여행기의 정석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브라이슨의 글을 읽다 보면 저기에 가고 싶다보다는 저렇게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나 빌 아저씨는 현대적인 변화에 대해 신랄하게 비난하는데, 영국인이 아닌 이들도 고개를 끄덕 거리게 된다.

그 시절 영국은 '유럽의 환자'로 불리곤 했다.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도 가난했다. 하지만 그 시절 영국에는 로터리며 도서관, 우체국, 마을과 시골병원 이곳저곳에 화단들이 있었고, 집이 필요한 사람들을 위한 공영 임대주택도 있었다. 영국은 매우 아늑한 나라였으며 병원에 직원들이 쉴 수 있도록 크리켓 경기장을 마련하고, 빅토리아 시대의 궁전에 정신 질환 환자들이 살 수 있도록 해 주던 매우 깨인 나라였다. 그때는 그렇게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왜 안될까? 누군가는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 도대체 왜 영국은 부유해 질수록 스스로 더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건 한국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경제위기라 하지만 분명 한국은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경제대국이다. 도대체 왜 그럼에도 불안하고 압박받는 삶을 살고 있는 걸까. 1년여에 걸친 영국횡단 여행을 통해 브라이슨은 시각적 이미지 보다는 지식과 분석, 역사적 이미지를 보여 준다. 길가 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정보들을 기호학적으로 바라보고 인문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그야말로 브라이슨만의 여행법이고 다라해 보고 싶은 멋진 방법이다. 그처럼 다닌다면 여행지 한켠에 놓여있는 돌 받침대의 주인이 누구인지도 알 수 있다.  


브라이슨은 자연을 사랑하고 환경변화를 미워한다. 산업이 편하게 하는 것을 믿지 않으며 옛것이 하나 둘 씩 사라지는 것에 대한 불쾌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브라이슨은 영국의 지도자가 이런 연설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강력한 국가가 되기를 멈추고 그 대신 아름답고 유쾌하며 문명화된 국가를 만드는데만 집중하겠습니다. 우리는 최고의 학교와 병원을 만들 것이며, 가장 편안한 대중교통 체계를 갖출 것이고, 가장 활기 넘치는 예술, 가장 유용하면서도 양질의 책이 가장 많은 도서관, 커다란 공원, 깨끗한 거리, 가장 계몽된 사회적 정책들을 만드는데 전념하겠스비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스웨덴 같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스웨덴 보다 청어는 더 적고 농담은 더 풍부한 나라가 될 것입니다.


영국은 멋진 나라다. 무질서하고 엽기적이며 정신없기도 하다. 하지만 문화적인 깊이가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사진 한장 없는 브라이슨의 글에서는 영국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디론가 가고 싶고 깊이 들여다보고 싶다는 욕망을 끓어오르게 한다. 어디든 자세히 둘러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다만 빌 브라이슨 식의 질문을 가지고 바라본다면 동네 앞 기념비조차 다르게 보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