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의 나라에도 어두운 단면이 있으니 그건 극악한 빈부격차다. 대부분의 가난은 흑인과 히스패닉이 차지하고 있지만 '힐빌리' 또는 '레드넥'이라고 불리는 백인 노동자 쪽의 가난 역시 만만치 않다. 그런데 이런 미국의 가난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큰 차이가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난은 <탈출기>에 나오는 것 처럼, 굶다 못해 쥐를 잡아먹고 영양실조, 몸을 팔고 그야말로 인간의 바닥에서 배고픔을 견뎌낼 지경의 가난이라면 미국의 가난은 건강한 음식 대신 패스트푸드, 8개월 된 아이에게 콜라를 먹이는 무지함, 그리고 알콜과 마약중독으로 대표된다. 저자는 힐빌리가 굉장히 가족 중심, 커뮤니티 중심의 사회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해체되면서 보다 심각한 문제가 된다라고 바라본다. 동의한다. 집단 커뮤니티는 최악의 상황에서 개인을 지키는 힘이 되어준다. 동양권이 가난을 극복하는 것도 그러한 커뮤니티 방식에서 왔다.
우리는 이렇게 자가당착에 빠져 생산직을 홀대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사무직에 종사할 수 있는지에 돤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전국의 모든 아이들, 심지어 우리 동네 아이들마저 성공을 위한 경쟁에 이미 뛰어들었다는 것조차 몰랐다.
그러나 이건 심각하다. 올라갈 길이 있는데 커뮤니티 전체가 이에 대해 무지하다는 건. 한국이 가난을 극복할 수 있었던 건 커뮤니티 99명이 희생하면서 올려보낸 단 1명의 극복자가 있었고 이들이 다시 몇명을 끌어올리는 일을 해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지역 이기주의, 건달 문화, 학연, 지연 등 현대 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생겨나긴 했지만 적어도 개개인이 포기하는 일은 없었다. 한마디로 힐빌리의 가난의 정도는 한국에 비할바가 아니지만 가족의 해체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것. 일상화 된 마약, 너무나 당연한 대여섯번의 결혼과 이혼은 쿨한 게 아니라 후대에 정서적 빈곤을 선물하고 다시 심각한 어른 '힐빌리'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벌어진다.
청소년기 아이들은 대개 어떤 친구와 어울리지 말라는 어른의 지시를 무시하지만, 그건 지시를 내리는 어른이 보니 밴스 여사 같지 않아서일 거다. 할모는 만약 내가 금지 목록에 있는 친구와 놀고 있는 꼴을 본다면, 그 즉시 친구를 차로 받아버리겠다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러고서 위협적으로 속삭였다. "할미가 그랬다는 건 아무도 모를꺼야"
힐빌리에서 탈출에 성공해 예일대 로스쿨을 졸업해 나름 성공했다 할 수 있는 저자 J.D.밴스는 자신의 탈출이 할머니(저자는 할모라 부른다)와 할아버지 덕분이라 말한다. 주변에 공부하라고 잔소리 하는 어른이 있다는 건 그만큼 성공할 수 있는 확율이 아주 조금이나마 올라간다고 말한다. 역시 동의한다. 배우지 못해 무지함이 일부 있더라도 밴스의 할머니는 억지로 학교를 보내고 나쁜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협박하며 며칠을 굶어 계산기를 산다.
엄마의 잘못된 선택이 할보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말에 지미 삼촌은 순간 발끈했다. "아버지가 베브를 망친 건 아니지. 베브한테 무슨 일이 생겼든 그건 빌어먹을 자기 잘못이라고." 위 이모도 삼촌과 같은 생각이었다. 어느 누가 이모를 비난할 수 있으랴. 엄마보다 고작 9개월 어린 이모는 할모와 할보가 최악의 부모였던 시기를 엄마와 함께 지켜봤고, 스스로 시행착오를 겪은 뒤에는 최악의 정반대 편에 놓인 상황으로 빠져나왔다. 이모가 해냈다면 엄마도 할 수 있어야 했다.
다행히 저자는 힐빌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었겠지만 대부분의 백인 노동자들은 무엇이 잘못인지도 모른채 남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가난한 건 흑인들이 일자리를 빼앗아서이고 복지 포인트가 있기 때문이며 그걸 노력안하고 타서 쓰는 소수의 힐빌리 때문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남 탓을 하는 사람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는 '트럼프'같은 정치인에게 기회다. 다같이 잘 사는 평범한 USA의 비전은 이들에게 먹히지 않는다. 특정 타겟을 공격하는 전략을 세운 '트럼프'는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보수 정치인들이 지역 감정을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이런 전략이 쓰여진다. 태극기 집회에 참석하는 노인들은 미친게 아니라 무지할 뿐이고 이용당할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자.
미국의 가난 형태에 대해 깊숙히 알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전체적으로 좀 지루하다. 마약과 이혼, 저자의 엄마가 이혼하고 결혼하는 얘기가 전체의 2/3 이상이다. 가난하고 불행하다고 하지만 한국의 끔찍한 가난을 간접 체험한 나로서는 우스운 수준이다. 그러다 보니 평이한 글들의 연속이다. 물론 전문 작가가 아니라는 면죄부는 있지만 그렇다고 지루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뒷 면에 빼곡히 적힌 수많은 추천사는 이 책과 어울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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