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 한복판의 한 여자와 세 남자
영화에서는 가슴아픈 사랑 이야기였지만 원작인 이 소설의 정체는 환상문학이다. 인간 개개인의 사랑을 테마로 삼고 있지만 전체적인 서사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환상이다. 강렬한 사막의 열기와 전장 한복판의 고독이 어우러져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등장인물은 총 4명. 히로인인 간호사 한나, 인도인 공병(지뢰제거 전문가) 킵, 아버지 같은 존재인 연합국측 스파이 카라바조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영국인(?) 화상환자가 그들이다. 이야기는 한나와 영국인 환자부터 시작 된다.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대 초반. 독일군과 공수를 반복하던 이탈리아의 한 수도원에 간호사 한나와 이름모를 영국인 환자가 살고 있다. 모두들 철수할 때 한나는 이 영국인을 간호 하면서 수도원에 머무른다. 이 이유가 굉장히 모호한데 단순한 애정이나, 숭고한 나이팅게일 정신 같은게 아니다. 소설 내내 배경이 되는 사막은 전쟁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이 영국인이 그 사막을 대표한다. 한나는 이 영국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본다. 온통 화상을 입어 자기가 누구인지 나타낼 징표가 없는 영국인에게. 한나가 이 영국인을 극진히 간호하는 모습은 전쟁으로 피폐한 자신의 모습을 치유하는 과정이다. 카라바조는 한나 부친의 친구다. 도둑이자 스파이기도 한 카라바조는 한나가 이곳에서 머문다는 소식을 듣고 한나를 찾으러 왔다가 영국인을 보고 의심을 품는다. 독일군 이중스파이였던 헝가리인 '알마시'가 이 영국인이 아닐까 하는 생각.
"알마시라는 헝가리인이 있었지. 전쟁 때 독일군 밑에서 일했고 아프리카 코프스에서 비행기도 좀 몰았는데, 아주 아까운 친구였어. 1930년대에는 대사막 탐험대의 일원이었지. 그는 모든 물구멍을 알고 있었지. 모든 방언을 알고 있고. 어디서 듣던 소리같지 않나? 전쟁 사이에 그는 줄곧 카이로에서 출발하는 탐험대에 끼었지. 그 중 하나가 제르주라(잃어버린 오아시스)를 찾는 거였어. 그러던 차에 전쟁이 터지자 그는 독일군에 합류했지. 1941년, 그는 스파이들의 길잡이로 사막을 거쳐 카이로까지 그들을 안내하는 일을 했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다
수도원 주변의 지뢰를 제거하다 합류한 킵은 인도인이다.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를 대표하는 인물인데 지뢰제거에 관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한나의 피아노 연주에 반한 킵이 수도원에 함께 머무르면서 이 수도원은 4명의 남녀가 함께 생활하는 공간이 된다. 킵과 하나는 사랑에 빠지고, 카라바조는 영국인(?)을 의심하고, 영국인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들려준다. 문단들이 독립적이고 시점, 사건순서가 뒤죽박죽이어서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헷갈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분명한 건 4명 모두 전쟁의 한복판에서 자기자신을 잃어 버렸고 이 수도원에서 그것을 찾고 채워나간다는 것이다. 전통적이고 운명 순응적인 삶을 잃어버린 킵은 식민지 하의 인도를 대표한다. 한나는 자신을 잃었고, 카라바조는 청춘을 잃었다. 영국인은 사랑을 잃어버렸다.
"다윗의 얼굴은 젊은 카라바조의 초상이고 골리앗의 얼굴은 늙은 카라바조. 그 작품을 그릴 때 자신의 모습을 담은 것일세. 청춘이 길게 뻗은 팔 끝의 나이를 심판하는거지. 스스로의 운명에 대한 심판. 난 내 침대 발치에 선 킵을 볼 때마나 그가 나의 다윗이라고 생각하오."
이 가운데 킵의 역할이 상당히 재밌다. 킵은 한나에게는 사랑을, 카라바조에게는 심판을 내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영국인은 한나와 카라바조에게 거울이 되고.
영국인의 사랑
영화에서는 이 이야기가 메인이다. 이제는 '알마시'로 밝혀진 영국인이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사막에서 지리탐험대로 활약할 당시 부유한 투자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졌으며 이를 알아챈 투자자가 사고를 내 비행기가 추락하게 된다. 알마시는 비행기에 타고 있지 않아서 살아남았지만 투자자는 사망하고 캐더린(아내)은 중상을 입는다. 구조를 요청하기 위해 사막 동굴에 캐더린을 남겨 놓고 100km떨어진 쿠프라 오아시스로 가지만 스파이로 의심되어 붙잡힌다. 3년 후 동굴을 찾아 캐더린의 유해를 수습한다. 카라바조에 의하면 그 투자자(클리프튼)은 영국군 정보부 소속이었으며 알마시를 감시하던 인물이었다. 카라바조는 알마시가 고의로 사고를 내어 둘을 죽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 진실인지는 알 수 없다.
"난 호수의 마른 바닥을 건너 쿠프라 오아시스로 향했어. '헤로도토스'1는 그녀와 함께 남겨두고 더위와 밤의 추위를 대비한 모포 하나만 들고 갔지. 그리고 3년 후, 1942년에 그녀와 함께 묻어둔 비행기를 향해 걸어간 거야. 갑옷 입은 기사처럼 그녀의 몸을 안고서."
사막의 환상
<잉글리쉬 페이션트>는 비극적인 서사를 가지면서도 음울하지는 않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신기루처럼 환상적이면서도 짭쪼름한 소금기를 가득 머금고 있다. 이야기는 덥고 끈끈하지만, 간헐적으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도 있다. 등장인물 내면의 고독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드러냈으며 치유되는 과정까지를 그리고 있다. 말미에서, 킵과 한나 결혼해서 아이를 두고 있는 목가적인 풍경을 보여준다. 의사가 된 킵은 인도에서 살고 있으며 과거 이탈리아 피렌체의 수도원 생활을 떠올리곤 한다. 한나는 자신을 치료하는데 성공했고 킵은 전통2으로 돌아갔다. 전쟁이 종료됨으로서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알마시의 진실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지만, 알마시의 사랑만은 진짜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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