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아 마음대로 하려무나, 숙명이란 어쩔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려무나1
타임슬립을 소재로 하는 SF 소설이다. 타임머신은 아니지만 어쨌든 과거로 여행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된 2060년대, '역사연구가'로 불리는 이들이 과거로 여행을 한다. 이들의 목적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군 공습에 파괴된 코번트리 성당을 재건하기 위해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 위해 탐사를 하는 것이다. 시간여행 기술은 개발되었으나 이게 돈이 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깨달은 초창기 연구가들은 손을 놓아 버린다. 시간여행은 네트라는 통로를 통해 이루어지는데 현대의 물건을 가지고 가거나 과거의 물건을 가지고 오는게 불가능 한 것. 따라서 어떠한 물건도 이동이 불가능 했고 무의미한 기술이 되어버린 것이다. 졸부인 슈라프넬 여사가 이 연구에 막대한 돈을 투자했고 옥스포드의 연구진들은 이 늙은 여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의미 없는 강하2를 계속하게 된다.
운명이 먼저인가, 인간이 먼저인가
시간 여행을 다루는 모든 매체는 한가지 선택지를 강요받는다. 역사가 수정 불가결한 운명인지, 아니면 개인의 변화에 따라 변화가 가능한 것인지. 일종의 나비효과의 인정 여부인데 이에 따라 방향이 많이 달라진다. 백투더퓨쳐, 터미네이터와 같은 대부분의 영화와 소설들은 후자를 따른다. 과거로 돌아가 잘못된 미래를 수정하는 줄거리가 대부분이다. 이를 메꾸기 위한 이론바탕이 평행우주 이론인 것이고. 이 소설 내에서도 두가지 의견이 대립한다. 역사가 이른바 그랜드디자인이라고 하는 운명론에 따른다고 주장하는 오버포스 교수와 개인 선택의 집합체로 보는 페딕교수가 서로를 못잡아 먹어서 안달인 상황이다. 물론 1800년대 말기의 옥스포드 내이지만.
독특하게도 이 책은 전자의 입장이다. 모든 운명은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수정이 불가능하냐 하면 그건 아니다. 어떤 행위를 통해 역사에 인과모순이 일어나게 되면 역사는 자체적인 교정을 하게 된다. 여러가지 사건이 중첩되어 일어나는 케이스. 코니 윌리스는 복잡하게 얽힌 스토리라인을 통해 인과모순과 그 교정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게 여느 추리소설 못지 않은 재미가 있다.
시간여행의 규칙
네트를 통해 시간 여행을 하는 데에는 몇가지 규칙이 있다. 이 규칙을 어기면 아예 네트 자체가 열리지 않아서 여행이 불가능하다.
1. 시대가 다른 물건은 이동할 수 없다. 단, 역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작은 물건따위는 부수거나 할 수는 있다.
2. 동시대에 동일한 인간, 물건은 존재할 수 없다. 내가 여행을 통해 내가 살던 다른 시기로 가는게 불가능하다. 또한 특정물건을 과거로 돌려보내 두개로 만드는 것도.
3. 어떤 사건 때문에 인과모순이 일어나는 경우 역사는 자체교정을 실시한다. 이 경우 시간여행의 편차가 생겨 원하는 장소와 시간보다 떨어진 곳으로 도착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편차는 크지 않지만,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에는 도착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떨어진 상태로 도착한다.
4. 시간여행을 많이 하면 이명현상, 사고력 저하 같은 증후군이 일어난다. 휴식으로 회복할 수 있다.
5. 미래로 갈 수는 없다.
위트넘치는 인물들, 무겁지 않은 주제, 강렬한 메세지
슈라프넬의 요청에 따라 시간여행자 네드는 코번트리 성당의 '주교의 새 그루터기'를 찾으러 1886년의 성당에 도착한다. 시간여행 증후군을 겪고 있는 네드는 잘못된 장소에 도착하고 어찌 하다보니 두 남녀의 만남을 방해하게 된다. 이들의 자손이 후에 2차대전에서 활약하는 폭격기의 조종사다 보니 자칫하면 2차대전에서 히틀러가 승리할 수도 있다. 인과모순을 맊기 위해 이 남녀를 다시 만나게 하는 것이 이 책의 줄거리다. 타임슬립보다 이 책의 재미를 더하는 건 우스꽝스러운 빅토리아 시대의 인물들이다. 온갖 사고를 다 치면서도 말끝마다 문학작품의 인용을 하는 테레스, 사치스러운 귀족의 영애이면서 머리에 든 게 없는 토시3, 강신회에 푹 빠져 있는 토시의 엄마 메링 부인, 물고기 수집에 열을 올리는 메링대령까지 하나같이 바보같지만 미워할 수 없는 캐릭터들이다. 책 전반에 펼쳐져 있는 위트와 유머가 우리를 빅토리아 시대를 여행하는 기분을 맛보게 해준다. 빌 브라이슨이 쓴 것 같달까.
게다가 여행 자체도 어려워보이지 않는다. 지구를 구하거나, 왜곡된 역사를 바로잡는게 아니다. 고작 '주교의 새 그루터기'를 찾는 것이 임무일 뿐이고 그중에 일어난 작은 사건 하나를 되돌리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좌충우돌 엄청난 일들이 벌어진다.
도대체 어떤 실수가 일어났나
여자 주인공인 콜린이 '주교의 새 그루터기'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빅토리아 시대로 간다. 여기서 물에 빠져 죽을 뻔 한 고양이를 구하면서 모든 일이 꼬인다. 이 고양이가 네트를 넘어 미래로 와버린 것. 어떠한 물건도 네트를 통과할 수 없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네트의 개념이 바뀌어 버린다. 도대체 이 고양이 '아주먼드 공주'는 어떻게 시간 여행을 할 수 있었을까. 이를 되돌려 보내기 위해 네드에게 고양이를 맡겨 다시 빅토리아 시대로 보내지만 시간여행 증후군으로 올바른 사고를 할 수 없었던 네드가 갈 곳을 잃고 터미널로 간다. 이곳에서 테렌스와 모드의 만남을 의도치 않게 방해하고 테렌스와 동행한다.
시공 연속체의 비밀
사실 모든 물건이 이동이 불가능한게 아니다. 과거 물건 중 파괴가 예정되어 있는 물건은 직전에 가지고 올 수가 있다. 주교의 그루터기는 공습 직전에 다른 여행자가 훔쳐갔고, 아주먼드 공주 역시 죽기 직전에 구해진 것이다. 이런 일들 때문에 인과모순이 생기는 경우에 시공연속체는 개개인을 통해 자체 교정을 실시한다. 정리하면 '아주먼드 공주의 실종-테렌스와 모드의 만남 실패-테렌스와 네드의 만남-테렌스와 토시의 약혼-코번트리 성당으로의 여행-토시와 베인이 사랑에 빠지다-파혼한 테렌스가 모드와 만나다-해피엔드' 이런 수순이다.
신은 사소한 것까지도 살핀다
내가 정리해 놓았지만 아직도 복잡하다. 결국 신이 그랜드 디자인을 기획하고 있고 역사는 순흐름대로 움직인다는 것이 증명 된다. 다만 인간 역시 그 안에서 교정의 일부로서, 역사의 일부로서 개개인이 살아간다는 것 또한 진실이다. 신은 단지 살필 뿐이다. 사소한 것까지 살피는 게 신 뿐은 아니다. 저자인 코니 윌리스 역시 사소한 하나하나까지 세심하게 설계해 놓았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설계도에 가까운 소설 얼개는 세심하게 읽을 것을 요구한다. 주교의 새 그루터기라는 얼토당토 않은 물건 때문에 2차대전에서 연합군이 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무리는 역시나 콜린과 네드의 달달한 로맨스로 지어진다. 긴 여정 속에서 둘만의 휴식이 기쁜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 또 이 책 내내 소개 되고 있는 '보트를 탄 세 남자' 역시 상당히 궁금해지기도 한다. 타임슬립물이 가지고 있는 거창한 역사적 사명 따위가 드러나지 않아서 읽는 내내 유쾌했다. 또, 친근한 등장인물은 말할 것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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