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국내에 소개된 빌 아저씨의 책을 모두 모았다. 별건 아니지만 이런걸로 뿌듯하다. <빌 브라이슨의 유쾌한 유럽산책>을 시작으로 이 시니컬 아저씨의 매력에 푹 빠져 여행기, 과학서적, 문학 이야기 등 각종 분야의 책을 하나 둘 씩 싸 모으다가 이번 <유쾌한 영어수다>를 끝으로 '빌 브라이슨 콜렉션'을 완성했다. 물론 앞으로도 나오는 족족 채워 나갈 생각이다.
이 큰 기쁨 뒤에는 작은 아쉬움도 하나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만난 책이 가장 재미 없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영어를 잘 못하는 내가 읽기에 어려운게 당연하겠지만 전작인 <발칙한 영어산책>의 경우 미국의 문화와 결부된 재미난 에피소드들 천지였기에 이번에도 특유의 유머를 기대하고 있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 오판이다. 물론 곳곳에 촌철살인의 표현들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너무나 미국식 또는 영국식 표현들이 주를 이루는데다 그 소재들 또한 영어인지라 비 영어권 독자로서는 문맹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영어를 잘 하는 이들에게도 어려울 것이 라틴어, 그리스어, 불어, 독일어까지 총 망라하는데다 영/미 영어의 아주 작은 뉘앙스까지 이해할 수 있어야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그럼에도 궂이 이 책을 읽은 느낌을 나열해 보자면...
먼저 빌 브라이슨은 영어권의 우수한 라이터 답게 영어의 우수성을 전제로 하고 이 글을 써 나간다. 물론 영어는 우수한 언어다. 미국과 영국이 패권국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비영어권 국가간의 의사소통도 공식적으로 영어로 하는 걸 보면 언어로서도 최 상위 클래스의 언어임은 확실하다.
의심할 나위 없이 영어의 미덕 가운데 하나는, 영어가 유동적이며 민주적인 언어로서 어떤 위원회의 명령보다는 일반적인 용례의 압력에 반응해서 의미가 이동하고 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빌 브라이슨의 영어관이 녹아있다. 빌 브라이슨이 바라보는 영어는 유동적이고 민주적이다. 어떤 언어라도 그대로 흡수하고 영어화 시켜 말하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외래어 정도가 아니라 라틴어부터 원주민의 언어까지 필요하다면 그대로 차용할 수 있는 개방성이 영어의 가장 큰 위대함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가장 큰 주제중의 하나가 발음의 다양성이다. 빌은 이 분야에서만큼은 영어가 엉망진창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알기에도 영어발음은 통일성이 없다. 대표적인 예가 묵음이다. knife에서 k는 왜 안읽히면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Featherstonehaugh는 어떻게 읽는 걸까? (이건 영국에 실제로 있는 성씨인데 무려 5가지로 읽힐 수 있다.) 미국도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영국이 훨씬 심해서 BBC에는 발음 전담부서가 존재하는 형편이다.
이 외에도 다양한 방언, 영-미-호주간의 영어차이, 각종 명칭들의 유래들을 직설적으로 풀어내고 있어 영어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즐겁게 읽을 수 있다. 영어를 잘 한다면 좋겠지만 나처럼 거의 못하더라도 읽는데는 지장이 없다. 영어공부를 위한 책이 아니라 언어문화 교양서니까. 이 책에서 빌 브라이슨은 영어만 가능한 것들 - 예를 들면 중의문 만들기 라던지-을 어필하면서 영어에 대한 자부심을 보이지만 국수적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긴, 빌 브라이슨 만큼이나 영어를 많이 쓰는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아쉬운 점이 있다면 빌의 전공분야가 아니어서인지 고증 오류나 과장이 유난히 많이 보인다. 국내 번역본은 꽤 시일이 흐른 후에 나와 주석으로 오류여부를 충실히 알려주고 있지만, 그동안 꽤나 정확한 지식과 냉철한 눈을 공유했던 빌에게는 작은 실망감이 든다. 빌의 유머, 여행기, 시니컬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궂이 보지 않아도 좋지만 빌이 가지고 있는 또다른 인사이트를 보고 싶은 이라면 이번 주말, 영어사전과 함께 읽어보는게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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