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 김승옥 단편집을 읽고는 '서늘한 새벽 같은' 소설이라 포스팅 한 적이 있다.([다시읽는 김승옥] 서늘한 새벽같은 소설집 보러가기) 대표작인 <무진기행>이 빠져 있어서 아쉬웠던지라, 최대한 안 겹치는 작품집을 다시 골랐다. 민음사판 무진기행. 표제작을 비롯해 9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왜 나는 김승옥의 소설을 새벽 같다 느꼈을까. 아마 홀로 있는 것 같은 외로움과 고독함. 밤을 샌 직후 허탈하면서도 오늘 하루도 어떻게 되겠지 하는 희망과 피곤함이 함께 섞인 냄새를 맡았나보다. 소설보다 50여년이 지난 현재. 서울은 1965년과 달라진걸까. 아니면 그 때보다 더 회색의 우울한 도시가 되었을까. 그건 읽는 사람마다 다르리라. 적어도 나는 조금은 나아졌다고 생각한다.
소설이란 추체험의 기록, 있을 수 있는 인간관계에 대한 도식, 구제받지 못한 상태에 대한 연민, 모순에 대한 예민한 반응, 혼란한 삶의 모습 그 자체. 나는 판단하지도 분노하지도 않겠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의미없는 삶에 의미의 조명을 비춰 보는 일일 뿐. - 1965년, 김승옥 -
1980년, 김승옥 작가가 직접 남긴 소설론이다. 김승옥 님의 소설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가 다 담겨 있는 저 글이. 무덤덤하게 남의 이야기처럼 써내려간 서울의 인간 군상 이야기가 대부분의 작품에 담겨 있다. 그 무덤덤함은 정도를 넘어 서서,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하는 경우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잘 만들어진 다큐를 보는 느낌이 든다. 평범한 일상을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볼 뿐인데 그 한 걸음 차이가 인간과 삶의 경계를 넘나든다. 예를 들면 <무진기행>에서의 주인공은 1인칭인 '나'이지만 좀처럼 정이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김승옥의 눈을 빌린 '나'는 밉거나 불쌍하지 않다. 그냥 저런 삶도 있구나 수준으로 비춰질 뿐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김승옥의 작품에서 작가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냥 조명을 비출 뿐이다.
이 건조한 조명뿐인 김승옥의 소설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오는걸까. 그건 수일을 고민하다 겨우겨우 써내려갔을 그의 문장력에 있다. '감수성의 혁명'이라 칭해질 정도로 심장을 파고드는 비수의 칼날은 구성이나 줄거리가 아니라 문장. 하나의 문장에 있다.
바람은 무수히 작은 입자로 되어 있고 그 입자들은 할 수 있는 한, 욕심껏 수면제를 품고 있는 것처럼 내게는 생각되었다. 그 바람 속에는, 신선한 햇볕과 아직 사람들의 땀에 밴 살갗을 스쳐 보지 않았다는 천진스러운 저온, 그리고 지금 버스가 달리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길을 에워싸며 버스를 향하여 달려오고 있는 산줄기의 저편에 바가사 있다는 것을 알리는 소금기, 그런 것들이 이상스레 한데 어울리면서 녹아 있었다. - 무진기행 中 -
시골로 내려가는 구식 버스 안에서 맡는 짠내가 맡아지는 문장이다. 살살 불어오는 바람에 잠도 쏟아지는 이 상황이 적나라하게 독자를 파고든다. 게다가 문장이 짧지도 않다. 일반적인 글쓰기에서 저런 긴 문장을 잘 못 쓴 문장이 되기 쉽다. 그런데 이 문장이 잘 못쓴 문장인가.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가. 필력이란게 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문장이다.
민음사판 단편집에는 아홉편이 실려 있다. 가상의 시골 도시 '무진'에서의 작은 일탈과 속물 근성을 그려낸 <무진기행>, 포장마차에서 만난 세 남자를 통해 차가운 서울을 소개하는 <서울 1964년 겨울>, 삼류 드라마에나 나올 법 한 삼각관계에 대한 이야기 <생명연습> 등이 실려 있다. 어린 소년이 일탈의 경험이나 나쁜 짓을 통해 어른이 되어버린다는 식의 이야기도 많은데 작가의 어두움을 볼 수 있다. <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이 그렇다. <역사>, <차나 한잔>에서는 잉여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다산성>처럼 의미없는 삶을 그려낸 작품까지.. 정말 다양하다. 그럼에도 그 하나 하나가 결국에는 우울한 서울을 비춰내는 거울이다. 우리는 이 거울을 통해서 아직까지도 외로운 '나'를 조금이나마 투영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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