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널리즘
우리는 진정한 저널리즘이 옳다고 믿고 있다. 언론의 자유를 위해 국민들이 싸우기도 하며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거나 잘못된 보도를 하는 기자를 '기레기'라 조롱하기도 하고 '찌라시'라고 깎아 내리기도 한다. 정확하고 사실 있는 보도, 외압에 굴하지 않는 언론은 국민을 대표한다고도 볼 수 있다. 언론은 사회의 면을 그대로 드러내는 표상이며 언론의 자유 없이는 민주주의도 없다. 사실일까?
뉴스가 너무 많다
보통은 언론의 가치를 말하고자 이 책을 쓴게 아니다. <뉴스의 시대>에서의 모든 뉴스는 까임의 대상이다. 정직하던, 부정확하던, 옳던 그르던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서의 뉴스는 너무나도 많다는게 보통의 생각이다. 뉴스가 너무 많다보니 특정한 인간들(예를 들면 편집국)에 의해 뉴스는 중요도에 따른 줄을 서야 하고, 우리는 한차례 정제된 뉴스를 너무 많이 들어야만 한다. 보통은 여기에 문제점이 있다 말한다. 뉴스가 정말 우리를 더 낫게 만드는지 다시한번 고찰해 보자고 책 서두에서 밝히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수백만이 굶어 죽어가는 기사가 걸그룹 멤버의 노출사고보다 후위에 배치되는 현실. 우리 옆집 할아버지가 이번주에 생일을 맞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저 지방 고속도로에서 버려신 변사체. 정말 이것들이 우리 삶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걸까. 알랭 드 보통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이 책에서 찾고자 한다.
중요한 뉴스에서 도움이 되는 뉴스로
당연한 얘기지만 뉴스는 중요한 내용을 전달한다. 똑같은 뉴스가 너무 많은데 정작 무슨 내용인지를 알 수 없다는 얘기다. 특정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더라도 맥락을 잃어버린 뉴스는 의미가 없다. 지금 우리나라를 휩쓸고 있는 '성완종 리스트'를 예를 들어보자. 메모가 나온건 사실이고 성완종의 자살도 사실이다. 검찰은 수사를 하고 있고, 리스트에 거론된 인물들은 부정을 하고 있다. 수사의 핵심은 청탁 여부인데 곁가지로 성완종의 특별사면에 대한 문제점이 거론되고 있으며 이 부분은 보수측의 물타기라는 지적이 있다. 이건 진짜일수도 아닐수도 있지만 특별사면에 대한 수사가 이뤄지는 것만은 사실이다. 자, 여기까지가 연일 뉴스에서 보도되는 내용을 개략 기억나는데로 정리한거다. 그럼 이건 단순한 뇌물과 청탁, 부정한 정치인의 문제인건가? 보통이 원하는 정치뉴스는 모든 맥락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뉴스다. 이 이상적인 뉴스는 권위 없이 우리가 생각할 바를 알려 주어야 한다. 정확한 사실관계와 이 사건이 우리 개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들을 알려주고 수사 이후 우리 사회가 어떻게 조금 더 진일보 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이상적이긴 하지만 꿈은 꿀 수 있다. 이번엔 셀럽, 우리식으로는 연예기사를 한번 보자. 대중의 관심은 정치, 경제 뉴스보다 연예뉴스에 있음이 사실이다. 알랭 드 보통은 이 현상에 재미있는 진단을 내린다. 친절함이 결핍된 사회일 수록 그런 경향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모두가 유명해지기 때문에 연예뉴스에서 대리만족을 얻거나 질투한다. 셀럽에게 자신을 투영해 보는 사람은 평범한 삶으로는 품위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 자존감이 결여 되었다. 사회가 개인 개인에게 친절하지 않으면 우리는 자존감을 잃고 연예인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뉴스가 줄어들 수는 없겠지만
<뉴스의 시대>를 읽고 나서도 내 뉴스 보는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출근하면서 핸드폰으로 주요 상위 기사를 살피고 근무중에도 짬짬히 인터넷을 보게 된다. 집에서도 8시 뉴스 정도는 보는데 정작 나에게 필요한 정보는 없다. 그 뉴스들이 내 머리를 이런저런 정보로 채우기는 했지만 정작 내 삶은 바뀌지 않는다. 19세기, 귀스타프 플로베르는 이렇게 말했다. "소작농들이 중산층의 4분의 3보다 덜 멍청하다. 중산층은 항상 자기들이 신문에서 읽은 것에 광적으로 빠져들고 한두 군데 신문에서 얘기한 것에 따라 풍향계를 빙글빙글 돈다"
매일 똑같은 뉴스가 우리를 성장시키지 못하면서 반복될 때 우리는 모든 정보를 내려 놓을 필요가 있다. 보통이 얘기하는 것처럼 완전히 이상적인 뉴스가 나올 때까지 정보를 차단할 순 없겠지만 무언가 내려놓음으로서 더 나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기자가 하는 판단, 편집국이 선정한 중요도의 순서 대신 깊은 사색과 독서, 제한적인 뉴스를 통해 스스로 올바른 뉴스를 만들어 낼 수 있지 않을까. 그 옛날, 정확한 뉴스 수단이 없던 시절 주변 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한 위인들을 떠올리자. 부정확한 정보들 사이에서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판단한 에밀 졸라라던지.
우리는 무선 신호를 끊고 읽을거리도 손에 쥐지 않은 채 멀리 기차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객실은 거의 텅 비어있고 탁 트인 경치가 펼쳐져 있으며 들리는 거라곤 기차바퀴가 철컹철컹 리듬감 있게 연속적으로 철로를 지나는 소리 뿐이가. 우리는 창가 자리에 앉아 비행기 여행을 떠날 필요가 있다.
PS. <영혼의 예술관>도 그렇고 이번 <뉴스의 시대>도 그렇고 보통은 자기의 내면적 성장에 도움이 되는가 아닌가로 대상을 판단한다. 이런 판단 기준은 작가나 철학가가 아닌 우리가 맹목적으로 따라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다. 다만 적정한 수준에서 이러한 이상론을 수용한다면 세상을 보는 방법이 하나쯤 늘어나지 않을까. 즐거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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