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오늘의 거짓말] 자신에게 닥쳤을 때 진정으로 배운 것처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슬슬살살 2015. 9. 28. 19:37

소녀같은 얼굴과 달리 시니컬한 문체로 평범한 인간의 내면을 잔인하게 파헤치는 작가 정이현의 단편집이다. 총 10편의 짧은 단편이 실려 있으며 쉽고 경쾌한 문장을 살리고 있어 가볍게 읽히지만 내용의 무게 까지 가벼운 건 아니다. 각기 다른 소재를 다루고 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일관된다. '평범함 속에 숨겨진 인간의 부조리'. 작가는 이 한가지 주제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나타낸다. 때론 아이를 둔 주부의 모습으로, 소설가를 꿈꾸는 백조로, 어떤 때에는 삼풍백화점에 친구를 잃어버린 노처녀로... 화자는 달라도 그들은 모두 외롭고 부조리한 인간의 군상을 품고 있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지만 아무에게도 일어나지 않은 일. 과연 그 일이 자신에게 닥쳤을 때 진정으로 배운 것처럼 선택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진짜로?

 

1. 타인의 고독
'타인의 고독'은 이혼남의 이야기다 서른 네살짜리 이혼남인 주인공은 재혼을 위해 결혼정보업체에 가입을 했지만 이전 부인과의 관계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다. 아이는 없지만 둘이 함께 기르던 개 '몽'이 있다. 전처가 재혼하면서 '몽'은 다시 주인공에게 돌아오게 되고 원치 않는 양육을 하게 된 남자는 이녀석을 손에 들고 베란다에 선다.

내가 양손에 힘을 빼고 저 밑바닥을 향해 녀석을 내던진다 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철퍼덕 소리와 함께 녀석의 몸이 바닥에 닿아 으스러진다 해도 아무도 나를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2. 삼풍백화점
삼풍 사태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으리라. 서태지의 문화를 향유하고 자란 평범한 여자가 삼풍백화점에서 근무하는 고교 동창 R을 만난다. 이 이야기에서 얘기하는 삼풍은 물질 만능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고 있는 한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대변하고 있는 공간이다. R은 의류매장의 직원으로서 요즘 흔히 얘기하는 '을'의 처연함을 보여준다. 삼풍이 무너진 이후에 R의 모습도 사라졌지만 '을'의 처연함은 아직까지도 살아 있다. 더 커진 채로. 삼풍이 무너진 것에 대해 여러가지 진단이 있었다. 대충주의, 뇌물 등 사회적 부조리의 집합체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거기에 R을 비롯한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것이 변했고 또 변하지 않았다.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자리는 한동안 공동으로 남아 있었으나, 2004년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아파트가 완공되기 전에 나는 멀리 이사를 했다. 지금도 가끔 그 앞을 지나간다. 가슴 한쪽이 뻐근하게 저릴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고향이 꼭, 간절히 그리운 장소만은 아닐 것이다. 그곳을 떠난 뒤에야 나는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다.

 

3. 어금니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작품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본다. 우리 아이가 어떤 사건의 가해자라면 어떤 기분일까. 난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주차 되어 있던 초고가 자동차에 못으로 낙서를 한 아이가 내 아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 어금니가 아파 치과를 찾은 중년의 여자는 아들의 사고 소식에 치료를 뒤로 미루고 대전으로 향한다. 똑똑한 머리로 카이스트에 다니던 아들은 음주운전을 했고 동승했던 여고생이 죽었다. 아들 역시 크게 다쳤다. 여고생이 아들의 성매매 대상이었음을 알게 된 여인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모른다. 아니, 아는 것과 행동하는 건 다른 문제가 되어 버린다.

아무말 없이 남편의 유리잔에 포도주를 따른다. 일을 수습하기 위해 그가 자행했을 여러 가지 노력에 대하여 얼마든지 집작할 수 있었다. 그가 현우의 아버지이듯 나는 그 아이의 엄마이므로.

 

4. 오늘의 거짓말
표제작인 이 작품은 환상 소설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든다. 위층에서 쿵쿵대서 올라가 보니 박정희를 너무도 닮은 노인네라니. 이게 될 법한 소리인가. 그럼에도 이 작품에 강하게 몰입되는 건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 것 같은 방식의 표현(실제로는 그 노인에게 보내는 편지다)과 그 주인공이 삶에 찌든 79년생의 홍민경이라는 아가씨라는 사실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평범한 이 아가씨의 직업은 운동기구를 파는 텔레마케터. 거짓말을 해서 먹고 사는 직업이다. 박정희를 닮은 이 노인을 통해 홍민경은 자신의 거짓말을 그만두어야 할 충동을 느낀다.

그럼 나는, 저 미지의 1929년에 대하여 무언가 새로운 것을 알게 될까? 1979년의 대기온도와 바람이 불어오던 방향, 바람의 속도 같은 것들. 1979년 7월 7일생의 불완전한 거짓망, 진짜 비밀의 공포에 관하여,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5. 그 남자의 리허설
성악가로서는 실패했지만 유능한 기획자와 결혼해 고급 아파트에 살고 있는 강선생. 아파트 열쇠를 놓고 나와 집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된 강선생은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일터로 찾아간다. 그곳에서 한때 라이벌이었던 남효준을 만나고, 알 수 없는 충동에 그의 공연을 망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욕조에 몸을 담근다. 강선생이 아파트를 빠져 나온 순간부터 나는 냄새의 정체는 뭘까. 나는 그걸 자괴감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남들이 맡고 있던 강선생의 자괴감을 스스로 알아차린 순간. 남효준의 공연을 망쳐버리는 것으로 자괴감을 날려버리기 위한 한걸음을 뗀다. 남자의 일탈은 묘한 카타르시스를 남기면서 평범한 우리들에게 한 가지 물음을 남긴다. 강선생 이제 어쩌지? 조금의 일탈조차 두려워 하는 난 어쩔 수 없는 소시민인가 보다.

리허설은 모두 끝났다. 후각이 마비되었는지 더 이상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6. 비밀과외
10개의 작품 중 가장 시대성을 많이 반영한 소설이다. '누구에게나 열 네살은 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작품에서 주인공은 1985년에 열 네살이 되었다. 법으로 금지된 과외를 하고 과외선생은 데모를 하다 잡혀간다. 밀수품을 방문판매 하던 엄마 역시 어느날 갑자기 사라진다. 과외를 해서 용돈을 벌고 민주화 운동을 하던 과외 선생. 화장품 따위를 밀수하고 비뚤어진 교육관과 천민 자본주의의 마인드를 가지고 있는 엄마. 어쨌거나 1985년. 둘 다 사라진다.

 누구에게나 열 네살은 왔다 간다. 1985년 그해, 너에게도.

 

7. 빛의 제국
SF 형식을 차용한 작품이다. 가까운 미래. 20대 대통령을 선출할 때이니 다음 정부다. 1984를 떠올리게 하는 시대상이 지금 우리의 삶과 별반 다를바가 없음을 깨닫게 해 섬뜩함을 선사하는 기가막힌 소설이다. 자살문화연구센터의 계약직 연구원인 김현수가 2004년 소년원 기능을 하는 비원여고에서 자살한 장유희의 자살이유를 되짚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비원여고의 각종 비리들. 통제하고 통제받는 인간들의 잔혹함. 이것을 덮는 위정자들이 모두 한 도가니 속에 들어가 있다. 결론적으로 모든 비리의 한복판에서 자살해 버린 장유희의 죽음은 정치적인 이유로 묻혀 버린다. 한 개인의 이유있는 죽음이 아무렇지 않은 일이 되어 버린 세상. 지금의 모습과 너무 비슷해 무섭다.

 

8. 위험한 독신녀
노처녀인 현주 앞에 대학 친구 양채린이 나타난다. 캠퍼스의 퀸이었던 양채린. 여자친구들의 질투와 남학생의 선망을 받던 그 채린이 20여년이 지난 지금, 대학 당시의 기억에서 멈춰버린 채로. 노처녀에 다급한 삶을 살아가던 현주에게 나타난 양채린은 불편함만 끼치는 듯 하지만 오히려 천진난만함과 순수함을 잃어버린 현주에게 싱그러움을 불어 넣는다. 내가 아니라 세상이 틀렸다.

 유행을 무시하며 살 수는 없을 줄 알았다.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삶은 유행보다 더디게 지나간다. 채린과 나는 얼마나 더 이곳을 견딜 수 있을까. 하지만 위험하지 않은 길은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제 나는, 그녀에게 간다.

 

9. 어두워지기 전에
남편이 연쇄살인마라고 추측이 되면 어떤 느낌일까. 윗집에서 아이가 죽었고 남편에게 이상한 낌새가 든다. 남편을 쫒다가 발견한 남편의 불륜. 이제 불륜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살인마일 수도 있는데 불륜이 대술까. 진범이 잡히지만 과연 이 여자는 남편에 대한 의심을 거둘 수 있을가.

우리 부부는, 우리는, 여전히 침대의 양 끝단에서 잠을 잤다. 훼손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난한 희생의 과정을 거쳐야만 사람은 비로소 어른이 된다. 완전한 가정을 이루려면 반드시 대가가 필요했다.

 

10. 익명의 당신에게
'어두워지기 전에'와 비슷한 전개다. 결혼을 전제로 사귀고 있는 의사남친이 알고보니 변태라면. 항문 성애자인 예비신랑을 용서할 수 있을 것인가. 용서하지 않는다가 일반적이지만 꼭 장담만은 못한다. 이게 진짜 나에게 일어난다면, 어쩌면 비겁한 선택을 하게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 불편하지만, 진실이다.

 


오늘의 거짓말

저자
정이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2007-07-13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달콤한 나의 도시]의 작가 정이현, 신작 소설집 출간! [타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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