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위화의 동명소설임은 워낙에 알려진 얘기니 두 번 거론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하정우가 직접 메가폰을 잡았다는게 더 중요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고작(?) 두 번재 작품이지만 영화를 보고나면 얼마나 감정을 잘 잡아냈는지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시대상을 잘 잡아냈다고는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은 가상의 60년대이지만 절대로 현실을 옮겨놓은 곳은 아니다. 궂이 비교하자면 '놈놈놈'처럼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냈다는게 정확하겠다. 원작의 배경이 중국인데 그래서인지 영화의 배경이 20세기 초반의 상해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마을 제일의 처녀 허옥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한 허삼관. 세명의 아들을 낳고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아간다. 그러나 첫째인 일락이가 하소용의 아들임이 알려지면서 이들 가정은 삐그덕 대기 시작한다. 영화를 쭉 살펴보면 그것이 질투에 기인한게 아니라 허삼관의 '체면'과 얽혀있음을 나타내는 증거들이 수두룩하다. 옥란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인게 그 증거다. 일반적으로 여인에 대한 사랑이 유지된다면 한순간의 실수, 혹은 여인의 아들을 품을 수도 있으련만 고지식하고 체면을 중시하는 허삼관이 일락을 품기에는 그릇이 작다. 한순간에 아비의 사랑을 잃은 일락의 모습이 애처롭다.
가족이 어려움에 봉착할 때마다 자신의 피를 팔아 생계를 이어나가는 허삼관. 결혼 이후에도 종종 피를 팔아 가족들에게 만두를 사먹이는 삼관의 모습은 어려운 시절을 관통하는 아비의 모습 그대로다. 어느날 일락의 친부 하소용이 의식불명에 빠지고 이를 살릴 수 있는 건 일락의 기도뿐이라는 사실에 아들을 내어주지만 겁에질린 일락의 모습에 분노하고 다시 세 아들의 아버지로 돌아온 허삼관. 그러나 이들 앞에는 또다른 시련이 닥친다. 일락이 뇌염으로 쓰러져 많은 병원비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옥란과 일락을 큰 병원으로 먼저 보내고 피를 뽑아가며 돈을 마련해 나가는 허삼관의 모습이 애처롭기 그지 없다. 허삼관이 서울로 상경하며 중간중간 피를 뽑아내는 모습은 이 영화에서 가장 감정이 폭발하는 장면이다. 친부 여부는 이제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부터는 삼관과 옥란의 들끓는 애정이 영화 끝날때까지 이어진다.
그런거다. 원래 피를 팔건, 신장을 팔건 아픈 아이를 치료해 나가는 건 당연하면서도 고결하고 그래서 더 감동으로 다가온다. 팔게 몸뚱아리밖에 없는 가난한 생활이 애처로움을 더하고. 브라운관에서도 이정도니 극장은 눈물바다가 되었음을 능히 짐작해 본다.
원작이 허삼관의 매혈을 통해 암울한 시대상을 조명하는데 집중했다면 영화는 가족애가 핵심이고 매혈은 그 수단일 뿐이다. 아마 영화 제목에서 '매혈기'를 들어낸 이유도 그때문이 아닐까.
PS. 하지원이 너무 예뻐 집중을 못했다는 평가도 상당히 나오지만 역으로 너무 예뻤기 때문에 억척스러움이 배가됐다. '1번가의 기적'에서도 보여줬듯이 예쁘면서 억척스러운 연기로는 최고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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