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데미안] 세계에 대한 투쟁 후에나 찾을 수 있는 자아

슬슬살살 2015. 11. 9. 17:41

초등학교 시절, '주말의 명화'에서 가장 무서웠던 영화가 <오멘> 시리즈다. 보고 난 후에 덜덜 거려서 화장실 조차 못갔던 기억이 있는데 이 영화의 주인공이 데미안이었다. 사실 두 주인공 간에 연결고리도 있는데 둘 다 일반적인 인격을 초월한 존재라는 점, 무신론을 넘어 신에 대항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 등이 유사하다. 물론 영화의 데미안 처럼 사악한 존재는 아니지만 샹클레어를 대하는 데미안의 초월적인 존재감이 더 두렵게 느껴지는 바도 있다.

 

<데미안>을 소개할 때 성장소설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이건 완전히 잘못된 해석이다. 싱클레어가 데미안으로 인해 성장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성장이 아니라 신으로부터의 독립과 초월이다. 싱클레어라는 나약하고 평범한 인물에 데미안이라는 선지자가 함께 하면서 반기독교적 가치와 함께 존재론적 의심의 씨앗을 뿌리는 이야기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1다."

 

가장 유명한 문장은 이것이다. 세계에 대한 인간의 투쟁. 알을 깨지 않고는 태어날 수 없으며 태어나서 향할 수 있는 곳은 아브락사스라고 하는 존재인 것이다. 여기서의 아브락사스는 표면적으로는 종교적인 일탈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해석으로는 갈길 잃은 청년이 '고작'향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세계를 깨어 버려야만 향할 수 있는 선과 악이 공전하는 또 하나의 세계. 그럼에도 껍데기를 깨어버리기 위한 투쟁을 멈추지 못하는 건 그러지 않으면 알 속에서 생을 마감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계를 깨어 버린다는 건 무얼까. 기존의 관습, 관념을 과감히 떨쳐 버림을 의미한다. 싱클레어의 어린시절 강렬한 공포였던 프란츠 크로머 같은 사람들이 이를 상징하는 메타포로 작용한다. 물론 크로머를 깨어버린 건 싱클레어가 아니라 데미안인 걸 보면 꼭 혼자서 세계를 깨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건 아닌가 보다. 싱클레어가 에바부인의 도움을 받아 각종 명상과 자아 성찰을 통해 스스로를 완성해 가기는 하는 것도 일종의 외부 도움이라 할 수 있겠다. <데미안>은 껍질을 함께 깨어주는 어미새 같은게 아닐까.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한다"

 

카발라를 떠올리는 신비주의적 표식이 작품 저변에 깔려 있어 기독교인들은 이를 어찌 받아들일지 궁금하다. 특히 기독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카인과 아벨>에 대한 다른 해석은 관습적인 면을 깨면서 일견 통쾌하기까지 하다.

요즘처럼 자신에 대한 철학적 고민이 얕은 세대에서 <데미안>의 메세지가 온전히 전달되는 건 쉽지 않다. 나 역시도 먹고살기 바쁘다는 이율 진지한 삶의 고찰을 해본 적이 있기나 한건지. <데미안>이 청소년기의 필독서인 이유는 역설적으로 그 때가 아니면 이 고민을 할 여유가 없어지기 때문은 아닐까. 싱클레어가 만난 데미안보다 <오멘>의 데미안이 기억에 남을 만큼 자극에 길들여져 버렸다.

 

 


데미안

저자
헤르만 헤세 지음
출판사
민음사 | 2009-01-20 출간
카테고리
소설
책소개
데미안을 통해 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이야기....
가격비교 글쓴이 평점  


  1. 칼 융에 따르면 아브락사스는 기독교의 신과 사탄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이며 저자인 헤세가 신봉했던 존재다. 선과 악을 한 몸에 포용하고 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