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제국의 미래] 관용과 불관용 사이에 선 미국

슬슬살살 2015. 11. 11. 22:22

인류의 역사에서 강대했던 제국들은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개중에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집단도 있었고 엄청난 인구를 기반으로 한 제국도 있었다. 한 명의 뛰어난 개인에 의해 세워진 패권국도 있었으며 독보적으로 민주정을 발전시킨 로마나 그리스의 사례도 있다. 제각각으로 보이는 국가들이지만 관용의 원칙으로 확장을 해 나갔다는 공통점이 있다. 거꾸로 그 관용의 원칙이 무너지는 때, 제국들은 몰락했다. 

 

 이 때 관용을 현대식의 관용으로 생각하면 안된다. 절대적 가치에서 피정복민은 박해 받았다. 무거운 세금은 물론이고 거주이전에도 제약을 받았다. 대다수는 관리가 될 수 없었고 어떤 경우에는 종교적인 탄압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정복자들은 당시 시대상에 비추어 상대적인 관용으로 피정복민의 자발적 충성심을 끌어내거나 최소한 제국에 반대하지는 않도록 만들었다.  

 

로마는 정복지의 종교적 자유를 절대적으로 보장했다. 피정복민의 문화중 유용한 것들은 모두 로마화 시켜 받아 들였다. 인종적 차별도 없었다. 북쪽의 게르만, 동양인, 아프리카의 흑인까지, 비아냥 거리는 수준의 차별은 있었지만 로마 시민권을 받기만 한다면 모두 수용했다. 그들은 원칙적으로 피선거권을 가지고 있어 집정관의 자리에 오를 수도 있었다. 현대의 한국에서 일본계 한국인이 대통령이 탄생했다 상상하면 당시 로마의 관대함을 정확히 알 수 있다. 관용은 로마의 인적자원을 무한적으로 늘였고, 다시 로마가 영토를 확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몽골도 마찬가지. 전 세계의 60%를 집어 삼켰던 칭기스칸과 그의 후예들은 최초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러나 제대로 된 축성 기술조차 없는 초원의 지배자들이 그 방대한 영토를 다스릴 수 있었던 건 관용 때문이다. 몽골의 적은 두가지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었다. 저항하다 패배한 경우, 어린아이까지 모조리 죽임을 당했다. 항복하는 경우에는 그대로 몽골인이 되어 기술을 전수하게 된다. 중국 북부의 기술자들은 공성 병기들을 만들어 냈고 거란의 학자들은 행정을 맡았다. 종교적으로도 매우 관대해 이슬람이건, 개신교건 자유롭게 포교하고 기도할 수 있었다. 때문에 기독교 중심 사회인 유럽에서는 신의 저주로 불렸지만 티벳이나 아랍 일대에서는 "주가 베푸신 자비이며 주가 내리신 은총"으로 불리기까지 했다. 몽골이 아무리 강력해도 전 유럽이 힘을 모아 대항 했다면 막아 낼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당시 유럽은 종교 갈등이 극에 달한 시대였고 절대로 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상태였다. 종교적 관용과 불관용이 맞부딪힌 좋은 사례다.

 

16세기 영국이나 미국, 현대의 EU는 각각 경제적인 관용이나 인종적인 관용, 종교적인 관용으로 패권을 움켜 쥐었다. 이렇게 관용은 패권 국가, 즉 제국을 이뤄내는데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강력한 군사력을 가졌으나 불관용 원칙으로 자멸한 2차대전 때의 독일과 일본의 경우도 있다. 히틀러가 관용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유럽 전체는 독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관용이 패권국가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관용 정책이 없이 폐쇄된 사회는 결코 성장할 수 없다. 저자, 에이미 추아는 관용을 '접착제'라고 부른다. '접착제'는 상이한 문화, 인종, 종교를 가진 종족들을 묶어주는 장치이며 로마에서는 시민권이, 영국에서는 경제적인 부가 그 역할을 했다. 미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경제력, 인종적 포용장치가 '접착제'였다. 그러나 911 이후 미국의 대외 정책은 보다 폐쇄적이고 공격적으로 변했다. 세계의 리더 대신 폐쇄적이고 강력한 경찰국가가 된 것인데 결코 미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 책이 나온 시기는 2007년이다. 오바마가 이끄는 미국은 다시 포용력 있고 관용적인 국가가 되었다. 다만, 911 이후 안보 분야에 있어서는 계속해서 딱딱한 모습이다.)

 

이 책은 제국에 대한 관점을 논리적이고 아주 쉽게 배열함으로서 직관적으로 주제를 읽을 수 있게 쓰여졌다. 물론 장표 중간중간 녹아 있는 중화사상, 미국 패권주의의 시각은 걸러 읽을 필요가 있지만1 전체적인 맥락에서는 아주 훌륭한 교양서다. 추아는 미국이 패권을 되찾고 초강대국으로 성장하는 제언 세가지로 이책을 마무리 짓는다. 첫째, 보다 오픈 된 이민 정책, 둘째, 일자리의 아웃소싱에 대한 관용, 셋째, 새로운 다자주의의 수용.

 

이민 정책은 인구를 늘리고 우수한 인적자원을 확보시킨다. 일자리를 해외에 만드는 건 해외의 노동자를 미국의 우군으로 끌어들인다.2 마지막으로 다자주의를 통해 세계적인 리더로서의 지위를 누릴 수 있다. 물론 이런 방식이 미국의 패권을 보장할 지는 지켜 볼 일이다.

 

마지막으로 대한민국. 우리나라는 다문화 가정의 문제,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 종교적인 갈등3, 이념적 갈등, 지역적 갈등, 세대간 갈등, 이데올로기, 정치성향, 빈부격차 등 극단적인 불관용의 시대에 있다. 패권 국가를 지향하는 바는 아니지만 관용에 대한 원칙을 정하고 계몽함으로서 도약의 기회가 생길 순 없을까? 갈등 해소 정도가 아니라 접착제가 필요하다. 

  1. 저자가 중국계 미국인 3세다 [본문으로]
  2. 이 논리는 사실 어색한 부분이 많다 [본문으로]
  3. 개신교와 그 외 종교간의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