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육신에서 그렇게 혼불이 나가면 바로 사흘 안에, 아니면 오래가야 석달 안에 초상이 난다고 사람들은 말하였다. 그러니 불이 나가고도 석 달 까지는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석 달을 더 넘길수는 없다는 말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은 그말이 영낙없이 맞아 떨어진다는 점이었다.
인터넷이 있는 지금에도 모으는게 불가능해 보이는 방대한 사료. 심지어 민속학 연구에 귀중한 정보까지 제공할 수 있는 소설. 그럼에도 소설적 긴장감과 재미, 20세기 초반의 시대상을 모두 드러내면서 당시 인물들의 고뇌와 가치관을 후대에 남긴 대작이 있다. 최명희 선생의 <혼불>. 마무리 짓기 전 타계하였기에 미완의 작품으로 남아 있지만 그렇기에 더욱 소중하다. 이 단 한편의 대작만을 후세에 남기고 떠났다.
<혼불>은 1900년대 초반, 일제수탈기를 배경으로 근대화와 유교적 가치의 충돌, 창씨개명, 반상 구분의 몰락 등을 남원 일대 매안마을의 가문과 그 주변을 배경으로 그려냈다. 이 매안마을과 거멍골에 살고 있는 인물들을 통해 전통적인 가치관이 붕괴하면서 맞이하는 양반의 고뇌. 궁핍한 삶을 살아가면서 가치관의 혼란을 겪는 민초들을 날것 그대로 되살려냈다. 어투, 용어, 관습등을 너무나 사실적으로 복원해내 현대인이 읽기에 마냥 편안하지는 않다. 게다가 수많은 에피소드를 시간순서와 무관하게 배치하고 곁가지로 풍습과 전래이야기등을 기하급수적으로 담아내 읽을거리가 차고 넘친다. 그나마 독자에게 다행인건 등장인물 수에 비해 관계가 단순한 편에 속하는 정도.
<혼불의 가계도>
다양한 줄거리가 얽히고 섥혀있지만 대표적인 큰 흐름은 5가지다.
1. 청암부인의 자수성가와 죽음
청암부인은 유교적 전통하에서 가장 큰 불행을 딛고 스스로 일어난 인물로 본 소설의 기둥이다. 18세에 얼굴도 모르는 양반 가문으로 시집을 오지만 가례의 전통에 따라 합방 후 1년여 후에 대실 이씨가문으로 넘어온다. 그러나 이 1년 사이에 새신랑 준의가 죽고 후손을 남기지 못한채 청상이 된 비운의 여인. 그러나 타고난 끈기와 운명에 순응하는 자세로 가문을 일으켜 죽기 전에는 만석꾼의 지위에 올라 이씨 가문을 이끄는 인물이다. 후손을 남겨 가문을 잇는 것이 지상 과제로 인식하고 있지만 억척스러움, 당당함, 대장부같은 기개와 지도력을 갖춰 반상을 떠나 존경과 두려움을 받는다. 청암부인의 죽음으로 구심점을 잃어버린 매실마을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2. 강모와 강실의 사랑
육신이 마주서도 한낱 허수아비에 불과한 사람고 있으려니와, 죽어서 혼백으로 흩날린 넋이나마 한 자락 애오라지 맺어지고 싶은 사람도 세상에는 있으리라.
강모가 때린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메다붙이고, 후려치고, 패대기치며, 물어뜯으며, 짓이긴 것은 오유끼가 아니었다. 그것은 대실의 혼행에서 맞닥뜨린 태산 같은 효원의 그림자였다. 집어삼킬 듯 우뚝하던 효원의 어깨였다. 어찌보면 그것은 강실이기도 했다...(중략)...그런가 하면 강실이가 아니라 청암부인이기도 했다.
이걸 사랑이라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사촌관계인 강모와 강실은 서로를 사랑한다. 현대인의 눈에도 패륜. 당시에는 '상피붙는다'는 표현을 쓰는데, 발각되면 종손이라 할지라도 멍석말이를 당할 만큼 중대한 범죄다. 흔한말로 사랑이 무언 죄냐 할 수도 있겠지만 남녀간 교류가 불가능했던 당시 시대상에서는 아주 흔치 않은 일은 아니었던 듯 하다. 부모가 정한 곳으로 혼인해야 했기에 오히려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었던 것. 유유부단한 강모는 사고(?)를 치고 염세적인 마음으로 청암부인과 매안마을을 등진다. 청암부인의 초상에도 참석하지 않는, 그야말로 패륜 오브 패륜. 강모를 통해 유교적 가치관에 가로막혀 버린 청춘을 보여준다. 상대적으로 피해자에 가까운 강실 역시 정면으로 사건을 돌파하기보다 가문과 개인의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만을 남긴다.
3. 효원의 질투와 강인함
강모의 아내인 효원은 강실에 대한 질투와 가문을 지키려는 마음 사이에 서 있다. 전통적인 여성의 미덕을 배워 참고 인내하지만 호방하고 강인한 성격으로 강모에 대한 미움을 숨기지 않는다. 이런 점이 많은 공감을 얻으면서도 전통적인 문화 속의 종부의 모습을 보여준다. 우여곡절 끝에 이씨 가문을 이을 아들을 낳는다. 특히 가문의 보존을 위해 강실을 모처로 옮기는 모습은 질투와 전통가치 사이에서 종부가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4. 춘복과 강실, 옹구네
왜 반상의 구분이 있는가. 왜 천민은 죽어라 일하고도 입에 풀칠하기 어려운데 양반은 손끝에 물하나 묻히지 않는가. 등장인물 중 가장 전복적인 인물이다. 천민중에서도 고아 신분을 가진 축복은 가장 격렬한 계급의식을 가진 인물이다. 만약 혼불이 계속되었더라면 충분히 사회주의자에 포함되어 이씨가문을 공격했을 인물이다. 강실을 억지로 취해 상민의 피를 자기 대에서 끝내고자 한다. 이 장면은 혈통이라는 유교적 한계를 깸과 동시에 춘복 스스로 그 가치관 안에 매여 있음을 보여준다. 과부인 옹구네가 이를 돕는데 이는 양반에 대한 반감과 춘복에 대한 어긋난 애정의 결합의 결과다. 이들을 통해 반상간의 충돌, 계급투쟁의 발화점을 버여주고 있다.
"형님, 사회구조 속에서만 계급이 생기고, 적대감이 생기고, 무능력한 노동자, 농민이 생기는 것은 아니올시다. 자기의 조내단뒤를 깨닫지 못하고, 그 존재단위를 생산으로 확산시키지 못하며 사는 사람이라면, 그자는 바로 의식의 무산자 아니요?"
5. 만주에서
조선에서의 전통적인 억압에 답답함을 느낀 강모는 사촌 형 강태와 함께 만주로 넘어간다. 당시 시대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목인데 일제는 조선인들을 만주로 강제 이주하고 있었다. 만주에서 이런 저런 조선인들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면서 비참했던 민초들을 그리고 있다. 추위와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조선인들. 동상에 걸린 딸의 볼을 마취도 없이 잘라내는 모습이라던지 간난아기들이 죽어나가는 모습, 그리고 그에 무덤덤하듯 울분을 참는 장면들은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참기 어려울 지경이다.
위에 열거한 큰 줄거리 외에도 수많은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그 하나하나가 당시 시대를 살아갔던 개개인의 애환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다. 쉽게 읽히는 소설은 아니지만 그만큼 진정성과 시대담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혼불>이다. 특히나 남원 일대에 소설의 배경이 고스란이 남아 있는데 사진만 봐도 모습이 아름답다. 언젠가 꼭 방문해 보리. 글만으로 시대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작품이 있다면 <혼불>이 가장 윗자리에 있다.
'열수레의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방인] 자신에게도 무관심한 남자의 살인 (0) | 2015.11.10 |
---|---|
[데미안] 세계에 대한 투쟁 후에나 찾을 수 있는 자아 (0) | 2015.11.09 |
[유혹하는 글쓰기: 스티븐 킹의 창작론] 세계 최고 소설가의 창작노트 훔쳐보기 (0) | 2015.10.20 |
[나의 유서, 맨발의 겐] 핵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자 (0) | 2015.10.11 |
[중세, 하늘을 디자인하다] 우리가 미처 몰랐던 아름다운 중세의 지도 (0) | 2015.10.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