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살인자의 기억법] 악인도 늙는다. 살인자도, 기억도

슬슬살살 2015. 11. 15. 21:05

자명하면서 간과되는 진리 하나. 악인도 늙고 병들 수 있다는 점.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은 천하의 개쌍놈이지만 10년 정도 지난 후에는 치매에 걸려 지난 일들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경우 이준석 선정은 결코 벌을 받는 다는 걸 자각할 수가 없다. 그러한 점에서, 늙어가는 악인에게 망각은 신이 내린 축복이다.

 

김병수는 치매에 걸렸다. 가까운 과거의 일부터 하나둘씩 망각하고 있다. 딸이 하나 있는 김병수는 원래 악인이다. 엄청난 연쇄살인마. 싸이코패스. 치매 진단을 받고 나서 하나 둘 기억이 사라진다. 마당에 있는 개가 내 개인지, 옆집 개인지 헷갈리기 시작한다. 은희에게는 남자가 생긴 것 같다. 선수는 선수를 알아 보는 법. 은희가 만나는 박주태는 최근 일어나는 연쇄살인마임이 틀림 없다. 은희를 지키기 위해 기억을 유지시켜야 한다. 이 책은 김병수가 필사적으로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해간 '살인자의 기억'이다.

 

오이디푸스가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거기 있을 것이다. 닮았지만 좌우가 뒤집혀 있다. 그는 나와 같은 살인자였지만 자기가 죽인 사람이 아버지인줄도 몰랐고 나중에는 그 행위마저 잊어버렸다. 그러다 자신이 저지른 일을 자각하면서 자멸한다. 나는 처음부터 내가 아버지를 죽인다는 것을, 죽이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후에 잊은적도 없다. 나머지 살인들은 첫 살인의 후렴구였다. 손에 피를 묻힐 때마다 첫 살인의 그림자를 의식했다. 그러나 인생의 종막에 나는 내가 저지른 모든 악행을 잊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를 용서할 필요도, 능력도 없는자가 된다. 절름발이 오이디푸스는 늙어서 비로소 깨달은 인간, 성숙한 인간이 되지만 나는 어린아이가 된다. 아무도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유령으로 남으리라.

 

치매는 가까운 과거의 일부터 잊게 된다. 김병수의 머릿속은 서서히 가장 가가운 과거의 일들을 지워낸다. 이 불완전한 기억으로 은희를 지킬 수 있을까. 후반에 이르러 <살인자의 기억법>은 김병수라는 한 개인의 세계를 깨어버리는 시도를 한다. 모든 것이 거짓이고 모든것이 진실이다. 결국 김병수는 은희를 죽이고 그 일을 잊는다. 기억, 기록된 책, 모두 엉망진창이다. 김병수는 영원히 살인마였고 그 일을 잊었으며 잊었기 때문에 그간의 완전범죄에서 벗어났다. 은희는 25년 전 김병수의 마지막 희생자였고, 최근 죽은 김은희는 동명이인의 요양보호사다. 김병수는 혼돈에 빠진다.

 

결국 모든것이 김병수의 짓이었고 스스로 기억할수도 없다. 김병수는 혼돈 속에서 無가 된다. 이 경우 김병수는 어떤 죄를 지었으며 어떤 벌을 받을 수 있을까. 기억도 하지 못하고 벌의 이유를 모르는데.

 

그러므로 공 가운데에는 물질도 없고 느낌과 생각과 의지작용과 의식도 없으며, 눈과 귀와 코와 혀와 몸과 뜻도 없으며, 형체와 소리, 냄새와 맛과 감촉과 의식의 대상도 없으며, 눈의 경계도 없고 의식의 경계까지도 없으며, 무명도 없고 또한 무명이 다함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고 또한 늙고 죽음이 다함까지도 없으며,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의 없어짐과 괴로움을 없애는 길도 없으며, 지혜도 없고 얻음도 없느니라.

 

단순히 반전있는 서스펜스로 보면 나약한 플롯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스스로를 잊고 무로 돌아가는 인간이 담겨 있다. 강제적인 잊음으로 범죄자이면서도 범죄자가 될 수 없는 이. 우리는 김병수를 통해 악의와 망각에 대해 깨닫고 의식과 징벌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김병수의 세계가 무너짐으로서 우리는 살인보다 더 무서운 공포를 간접적으로나마 만나볼 수 있다. 특히나 무겁지 않고 리듬감 있는 김영하의 필력이 김병수의 무너짐을 더 깊게 만든다.

 

"무서운 건 악이 아니오. 시간이지. 아무도 그걸 이길 수가 없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