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경의 터널을 빠져나가니, 설국이었다.
서두만 읽어도 '아 이 소설'하는 작품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시작이다. 국경이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이국성, 설국이 들려주는 하얗고 서늘한 배경. 15자로 이렇게 강렬한 문장을 두고 번역가는 얼마나 고민했을까. '가와바타 야스나리'. 1968년 노벨 문학상에 빛나는 작가다.
'게이샤 문학'이라는 특징만 본다면 작품의 내용이나 소재가 우리 정서와 잘 맞지 않는다. 불륜과 치정으로 보이는 인물 관계에서 순수한 사랑과 아름다움이 인식되질 않는다. 그러나 일본 특유의 '게이샤'라는 직업군은 단순히 '몸을 파는 여성'을 넘어선다. 이 소설에서 게이샤 '고마코'는 주인공과의 사랑을 속삭이는 천한 여성이 아니라 구속 받는 직업 속에서 한 명의 인격체를 만들어 가는 인물이다.
한량 시마무라가 찾은 곳은 눈이 많이 오는 어느 고장이다. 게이샤 '고마코'를 만나기 위해서다. 극중에서 시마무라는 어떠한 사건에도 개입하지 않는다. 재미있는게 사건이 항상 시마무라를 중심으로 전개 되는데 정작 시마무라는 특별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 쉽게 생각하면 <동급생>같은 느낌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돌아다니기만 할 뿐인데 모든 스토리는 그를 중심으로.. 노벨 문학상 수상자의 작품과 비교하긴 좀 그렇지만 묘하게 분위기가 비슷하다. 어쩌면 이게 진정한 일본 정서일지도...
고마코를 만나러 내려오는 길에 본 요코와 그와 동행한 남자 유키오. 병에 걸린 유키오는 고마코와 약혼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닐 수도 있고. 요코와 유키오 역시 연인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요코의 집에 불이 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 되지만 무엇 하나 명확한 것이 없다. 이들의 인간관계는 어느 하나 명확하지 않고 누구하나 선을 긋거나 사랑을 고백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접근이, 문화적 차이가 있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어느 장면이 아름다운지 이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외국 도서인지라 번역빨(?)을 타기도 하고, 지역적, 시대적인 문화차이도 존재한다. 스토리 중심의 소설이 아닌지라 번역된 고전 문학을 곱씹어가며 읽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다만, 흰 눈의 도시에서 이국적인 하루하루를 접근하는데 만족한다면 충분히 '설국'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으리라.
조금 덜 유명한 <이즈의 무희>가 더욱 와 닿는 건 적어도 이런 모호성은 벗어났기 때문이다. 이 작품 역시 기생문학의 궤를 잇고 있긴 하지만 여기서는 어린 무희에 관심을 가지는 주인공을 통해 일본의 시대적 배경과 야릇한 성적 호기심을 가진 청춘에 대한 묘사가 탁월하다. 어린 무희에 관심을 가지고 그들을 따라다니는 부잣집 학생. 성적인 도착에 가깝게 보이는 주인공의 모습은 흔히 표현하는 '아름다운 청춘'과 거리가 멀면서도 충분히 사실적이다. 궂이 얘기하자면 부끄러운 공감이랄까.
<서정가>는 영적인 감각을 가진 여인의 이야기다. 영적인 능력을 가진 다쓰에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연인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을 띄고 있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연서이자 윤회, 죽음에 대한 에세이로 보이면서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작용하는 애정'에 대해 절절하게 보여 준다.
<이즈의 무희>, <서정가> 모두 짧은 단편으로 <설국>의 부록 같은 느낌이지만 오히려 훨씬 아름다운 서정성을 가지고 있다. 모두 시대적, 문화적 차이가 큰 관계로 노벨상의 이유를 찾기는 어렵지만 말이다. 일본과의 문화적 거리를 새삼 실감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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