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신>, <대형 설서린> 등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 설봉은 특이한 무협작가다. 지금이야 중견 작가의 반열에 올랐지만 <남해삼십육검>이 나온 때에는 주목받는 신예였다. 당시 가볍고 유쾌한 신무협이라는 장르가 나오면서 대세는 그쪽이었는데 설봉은 특이하게도 정통 무협에 가까운 글을 썼다. 주제는 가볍지만 글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물론 이건 나중 얘기고 <남해삼십육검>때만 해도 글이 무르익기 전이라 문장이 평이하다. 오히려 시도가 패기 넘친다. 전 중원을 활보하는 일반적인 작품에서 벗어나 해남도라는 특정 지역으로 무대를 한정했다. 또 수많은 문파들이 등장해 세력 싸움을 하는 관습도 벗어났다. 거기다 무협의 기본인 '겨룸'에서도 과감하게 탈피하고 추리적인 요소를 글의 중심에 두었다. 완성도를 떠나 실험적인 작품임은 분명하다.
해남도는 섬이다. 중원에서의 위치는 몰라도 이 섬에서 해남파는 지존이다. 12개의 가문의 연합체인 해남파. 그 중 비가의 일원으로 어릴적 쫒겨났던 적엽명이 해남도로 돌아오면서 이야기는 시작 된다. 해남도에서 쫒겨난 이후 군부에 몸담았던 적엽명이 돌아온 건 무언가를 조사하기 위해서다. 첫째는 해남도에서 올라오는 공물들이 털리는 일이 빈번한 것. 둘째는 이를 조사하기 위해 해남도로 잠입했던 이들이 모두 죽거나 연락이 두절 된 것이다. 적엽명은 이를 조사하기 위해 특명을 받고 해남도로 잠입한다.
<남해삼십육검>에는 기연을 얻어 강해진 이도 없고 수백명을 무찌르는 절대 강자도 없다. 아무리 고수라도 끽해야 십여명을 겨우 당해낼 정도이고 적엽명이라 해서 그리 강한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냉철할 정도로 밸런스 조절을 잘 한 결과 나름 사실적인 무협이 탄생했다. 게다가 돈 문제가 전체적인 세력 균형에 핵심인 점도 리얼리티를 강하게 만든다. 사실적인 글이 강점일 수도 있겠지만 장르 특성이 비현실성을 기반으로 함을 생각하면 잘 맞지 않는 독자들도 꽤 될 것 같다.
또 하나의 특징은 무협에서의 '협'이 없다는 점이다. 등장인물 그 누구도 정의를 위해 움직이는 이는 없다. '돈', '가문', '명예', '직업' 그 어떤 것이든 자신과 주변을 위해서 움직이지 남을 돕는 '협객'이란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만 저만한 하드보일드가 아닐 수 없다. 또 비무대회라던지 객잔에서의 싸움 같은 무협 필수 막장요소도 철저하게 빠져 있다. 어디선가 본 듯한 장면들로 점철된 양산형 무협과는 기본기가 다르다. 다루고 있는 주제도 평범하지 않아서 범인을 찾는 추리적 요소를 이용해 '섬'이 가지고 있는 폐쇄성, 한족과 토속인간의 갈등, 신분제, 가진 자들의 위선 들을 복합적으로 다룬다.
모든 일이 해남파 후계자 한민의 '대륙진출 야욕'과 군부를 떠나 할일이 없어진 자들의 '적응', 기사청 장군의 '물욕'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이뤄졌다는 결말은 놀라운 반전이 아니지만 납득할 만 하고 사실이 밝혀지는 과정 속에 들어 있는 '무협'과 '모험'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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