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말(Himal)dms 6천미터 이상 봉우리에만 붙는 단어다. 산스크리트어로 눈(雪)을 뜻하는 히마(Hima)와 집을 뜻하는 알라야(Alaya)의 합성어. 정유정은 만년설이 거주하는 집, 히말라야를 첫 해외 여행지로 뽑았다. <28>과 <7년의 밤>으로 스타 작가에 오른 정유정은 지쳤다. 힐링을 위한 수많은 여행지 중에서 왜 하필 히말라야에서 안식을 취하려 하는가.
뚜렷하게 얻고자 하는게 있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모든 일에 죽기 살기로 매달려서 녹초가 되는 성격에 제동장치가 필요했다. 정유정을 말릴 수 있는 방법은 좋은 휴식처가 아니라 강한 적군이다. 전의를 활활 불태울 목표. 여기에 히말라야보다 적합한 도전이 뭐가 있을까. 아무튼 한번 결심한 건 죽어도 하고 만다는 해병대(?) 정신으로 무장한 여성작가의 쏘롱라패스 도전기다. 물론 관악산 하나 제대로 못오르는 저질체력이라는 사소한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멤버는 동료작가 김혜연, 셰르파 검부, 포터 버럼까지 4명이다. 이 4명이 17일동안 안나푸르나의 쏘롱라패스를 관통한다. 여자 둘도 했으니 편할 거라고 생각지 말자. 이 짧은 17일 중에도 한 명의 길친구가 죽어나가는 난코스이니. 무려 5,416미터의 세계의 지붕을 이루는 곳이다. 여정은 결코 경쾌하지 않다. 우리는 재미있는 여행, 즐거운 볼거리 대신 걷는 아픔, 변비의 고통, 배고픔, 입맛에 안맞는 현지 음식.. 시시 콜콜한 고생담을 맞닥뜨린다. 하긴, 원래 여행이라고 삶이 아닌건 아니니까.
가장 좋아하는 여행기를 꼽으라면 단연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이다. 고대 유적지도, 화려한 미술품도, 커피를 즐기는 파리지앵도 없지만 <나를 부르는 숲>이야말로 현실의 고생담이며 살아있는 여행이다. 오로지 숲속을 걷는 일로만 기록된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책은 숲의 축축한 냄새를 맡게 해 주고 땀냄새와 캠프의 음식냄새, 간간히 찬물로 샤워할 때의 쾌감을 그대로 전한다. 수많은 미사여구와 감상적으로, 멋진 사진이 덧붙여진 된장남녀들의 유럽 여행기 사이에서 얼마나 사람 냄새 나는 진솔한 여행기인가.
<히말라야 환상방황>은 그 다음이다. 빌의 위치를 생각하면 정유정 작가도 별로 불쾌하진 않을 거다. 정유정의 '환상방황'은 말 그대로 방황이다. 그냥 고생하고, 걷고, 변비에 걸리고 물을 마신다. 간간히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 오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경치는 사이드. 진짜는 걷고 춥고 하는 고생길에 있다. 그런데 사실 진짜는 거기에 있다. 예전 2박3일 동안 지리산을 관통했을 때도 그랬다. 그냥 걷고 때되면 불편한 밥을 먹는게 다였는데 기억에 강하게 남는다.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인간을 숭고하게 만드는지도 모르겠다.
대부분의 여행기가 가식을 품고 부러움을 끌어낸다면 <환상방황>은 날 것 그대로이면서 동행을 이끌어 낸다. 아마 죽는 그날까지 히말라야를 실제로 볼 가능성은 0.1%도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녀온 듯한 개운함을 남긴다.
여정이 끝났을 때, 정유정은 과연 충전을 했을까?
어떤 목소리가 답해왔다.
죽는 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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