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마르탱 게르의 귀향-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대신 사는 것이 가능할까

슬슬살살 2016. 1. 12. 22:40
1540년대, 프랑스의 한 마을에서 꽤 부유한 20대 후반의 농민이 미모의 부인과 아글을 남기고 집을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돌아왔다. 적어도 부인과 가족을 포함란 주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 그 부인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지내고 새로이 딸까지 낳고는 돌아온 그가 진짜 남편이 아니라고 하여 그를 사기꾼으로 고소하였다. 그는 재판 과정에서 자신이 진짜 마르탱 게르라고 판사들을 설득하는데 거의 성공하였으나, 실화치고는 절묘하게도 바로 그때 진짜 마르탱 게르가 나타나 그만 정체가 드러났고 끝내 사형에 처해졌다.

 

이 영화 같은 사실이 실화라니 흥미진진하다.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중세 사료들을 통해 이 희대의 사건을 조명하고 그 사건 행간에 숨겨진 이야기들로 당시의 시대상을 반추한다. 소설처럼 흥미 진진한 맛은 없지만 당시의 생생한 삶의 모습을 접할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를 제공한다.

 

먼저, 이런 일이 가능할까. 아무리 1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하더라도 아내까지도 속이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 사실 우리는 세월이 지나도 사람의 얼굴을 기억할 수 있다고 착각하지만 그건, 거울과 사진같은 보조적 장치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한번 10년 전에 가까왔지만 한번도 만나지 않았고 사진 조차 없는 이의 얼굴을 떠올려 보자. 의외로 이미지는 떠오르지만 구체적인 얼굴의 모습은 잡히지 않는다. 우연히 아주 유사하게 닮은 사람이라면, 충분히 가족도 속일 수 있을 정도는 될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는 마르탱의 아내 베르트랑드의 도움이 있기도 했다. 마르탱이 돌아오면서 베르트랑드는 상속 재산에 대한 권리, 정조를 지킨 여성으로서의 자랑스러움이라는 실리와 자신을 사랑해 주는 한 남자까지 얻을 수 있었다. 절대로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가짜 마르탱과 베르트랑드는 사이좋은 부부로 2년간 생활해서 딸까지 나았다. 마르탱 게르의 다른 가족들 역시 10여년 전의 마르탱을 확실히 기억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이 기가 막힌 사기극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의 재미는 이 사건 뿐이 아니다. 무려 700여년 전의 이 사건을 우리가 이렇게도 자세히 살필 수 있던건 놀라운 기록문화 때문이다. 이 엄청나게 자세한 법정 기록과 다른 문서들은 당시의 시대상, 종교관, 가치관, 재판 절차, 이혼과 결혼에 대한 풍습까지 너무나 디테일한 생활상을 만나게 해 준다. 이런 기록문화도 놀랍지만 재판 절차도 흥미롭다. 이미 16세기에 형사재판의 전형을 만들어낸 프랑스의 선진성에도 놀랍고, 비록 비인권적인 부분이 없지 않지만 증거중심주의를 채택하고 있는 당시의 재판 문화도 대단하다.

 

재판 결과는 더욱 놀라운데 판사의 재량이 높은 당시의 법정에서는 너무나 현명한 판결을 내렸다. 먼저, 가짜 마르탱에게는 교수형을 선고했는데 당시 형벌로는 가혹하지 않은 편이었다. 거기에 가짜 마르탱이 본처와의 관계에서 낳은 딸은 마르탱 게르의 자식으로 인정받아 상속권까지 받았다. 이유는 베르트랑트가 마르탱 게르와 관계를 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이가 서출이 되기 위해서는 부모 양쪽이 상황을 의식해야 했다. 게다가 재판정은 아르노 뒤 틸(가짜 마르탱의 본명)의 재산을 몰수 하지 않고 대신 재판 비용 정도만을 변상하고 딸에게 상속하게 했다.

 

당시 재판정은 선고 후에 공범을 자백받기 위한 고문을 허용하고 있었는데 여기에서도 빠졌다. 재판정이 베르트랑드가 공범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간음으로 인정이 되는 경우 수도원에 감금되어야 하는데 이미 많은 벌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놀라운 사건과 생생한 생활상이 흥미롭기는 하지만 읽기에 편한 책은 아니다. 전문 번역가가 아니라 서양사학자의 손에서 번역된 이 책은 보기보다 친절하지 않다. 번역은 딱딱하고 문장은 들쭉날쭉하다. 문장과 문장과의 연결도 두서없이 바뀌는 경우가 많아 지루한 면도 없잖아 있다. 그정도의 단점(?)을 제외한다면 중세 프랑스의 독특한 사건을 만나보는 데 이만한 기록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