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여름 별장, 그 후: 유디트 헤르만] 재미보다 사색이 필요한 순간에

슬슬살살 2016. 1. 19. 22:42
이 작품집에 나오는 대화, 만남, 사건들은 배경과 장소를 불문하고 막연하거나 가변적이고, 임의적이며 유동적이다. 뭔가 불편한 느낌, 공허함, 아스라함, 이유 없는 슬픔, 불안, 몽상, 당황스러움이 묻어나오지만 어디에서고 '쓸쓸함'이나 '고독'이라는 단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는 것, 보류해 두는 것, 암시만 하고 미루어 짐작해야 하는 것, 바로 이것이 유디트 헤르만의 작품에 깔린 매력이다. 보고 형용할 수 있는게 아니라 볼 수 없는 것, 말 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이야기. 다 해결해 주는  언어가 아닌 그 반대의 자제와 절제, 침묵의 언어로 환상 없이 대면하려는 태연한 시선.
(옮긴이의 말 中에서)

 

백마디 리뷰보다 옮긴이의 말에서 발췌한 이 두 단락이 가장 정확한 표현이다. 태연한 고독. 읽으면서 내내 제임스 설터가 떠올랐다. 흐름이 없되 장면을 포착한 미문들. 익숙한 형태가 아닌지라 쉽사리 지루해지던 단편들. <여름 별장, 그 후>도 비슷하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유와 상징을 바른 미문들 사이에서 쓸쓸함을 느낀게 나 뿐만은 아니었나보다. <은교>를 연상시키는 <헌터 톰슨 음악>같은 작품은 그나마 익숙한 느낌이지만 <발리여인> 같은 작품은 거꾸로 너무나 어렵게 다가온다.

 

의자에 앉아 옷장을 바라본다. 그는 녹음기를 신문으로 싸서 끈으로 묶어 책상 위에 얹어 놓았다. 포장한 게 영 말이 아니다. 헌터는 눈길을 거두고 옷장으로 가서 양복을 꺼낸다. 양복은 검은색이고, 먼지 냄새가 나고, 무릎과 팔꿈치 부분이 닳아 있고, 깃은 반질거린다. <헌터 톰슨 음악>중에서

 

<여름 별장, 그 후>에는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하나하나가 모두 고독하고 쓸쓸하다. 군중속에서 느끼는 고독이 아니라 완전히 세상과 단절된 사람들이 주인공이다. 하나같이 세계속에서 완전히 '홀로' 된 사람들. 이런 저런 이유로 바깥과 가까스러운 연결선을 쥐고 있지만 불안함은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하나의 선마저도 언제든 놓을 수 있다는 관조가 더 고독해 보인다.

 

누군가가 나에게 '읽을 만한 것'을 추천해 달라면 이 책은 절대 거기에 끼지 못 할 것이다. 그러나 하루키의 단편이나 제임스 설터의 미문을 좋아하는 여성이 '괜찮은 것'을 주문한다면 딱 적당하다. 어떤 때에는 재미보다 사색이 필요한 순간이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