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깝게도, 세상의 모든 SF는 이 양반이 먼저 생각해 버렸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SF적 상상도 절대 새로울 수 없는 이유는 한 세기 전에 가능한 모든 걸 다 글로 남겼다. 후손들로서는 본의 아니게 창조의 기회를 잃어버리거나, 손쉽게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어째서 이런 극단적인 표현이 가능한가. 필립 딕이 남긴 100여개의 단편, 30여편의 장편이 엄청난 발상의 시작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비범함에도, 시대를 너무 앞선 필립 딕은 생활고에 시달리다 죽었고 영상 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위대함이 다시 조명 받게 된다.
만약, 선생이 실제로 화성에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언제나 전액을 환불해 드립니다.
<블레이드 러너>, <토탈 리콜>, <페이첵>, <마이너리티 리포트>같은 SF 명작들이 필립의 소설을 기반으로 한 작품들이다. 명확하게 원작이라 하지 않는 건, 단편의 특성상 영화의 큰 틀이 되는 독특한 모티브만을 제공할 뿐, 스토리 전반에 걸친 이야기는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필립 딕의 소설은 아이디어를 제공할 뿐이다. 문제는 그 아이디어가 너무나 참신해 도저히 그걸 넘는 걸 만들어낼 재주가 없다는 거다. 예를 들면 내가 알고 있는 세계가 알고보니 외계인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던가,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사람이라는 설정, 시간 여행에 대한 패러독스, 낙태를 합법으로 하는 디스토피아, 외계 행성의 개척, 우주 전쟁, 긴 우주여행 도중, 냉동 수면에서 깨어버린 사람 등등.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는 그의 단편 중 25편을 담았다. 세기를 뛰어넘는 그의 재기발랄함은 2016년에도 반짝 거린다. 두꺼운 분량이 선뜻 붙잡기 어렵지만 한번 시작하면 도저히 멈출 수 없다. 특히 우울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풍자 가득한 해학을 오가는 그의 열린 사고방식이 감탄을 자아낸다. 지난번 읽었던 <티모시 아처의 환생>이 너무 어려워서 망설였지만 역시나 단편에서만큼은 압도적인 스케일과 상상력을 보여주는 필립 딕이다.
작고 검은 상자/프놀과의 전쟁/운이 필요없는 게임/귀중한 유산/은둔 증후군/테란 오딧세이/약속은 어제입니다/신성 논쟁/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표지로 판단하지 말 지어다/복수전/옛 선조들의 믿음/할란 앨리슨 선집 '위험한 예지'를 위한 모든 이야기를 끝내기 위한 이야기/전자개미/모자란 비버 캐드버리/시간 여행자를 위한 작은 배려/전 인간/시빌라의 눈/컴퓨터씨가 나무에서 떨어진 날/출구는 안으로 향한다/대기의 사슬, 에테르의 그물/죽음에 관한 이상한 기억/어서 그곳에 도착했으면/라우타바라 사건/외계인의 사고방식/그리고 토머스M디시의 서문과 필립K딕이 직접 쓴 부록
'열수레의 책읽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이름은 빨강] 동서양의 예술이 부딪히는 그 순간, 한 건의 살인 (0) | 2016.08.20 |
---|---|
[토지] 변혁의 시대, 투쟁의 역사 (0) | 2016.07.23 |
[폐쇄 구역, 서울 - 정명섭] 좀비 폐허가 되어 버린 서울,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0) | 2016.06.13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한비야] 지도 밖 그녀가 아름답다 (0) | 2016.06.10 |
[약속의 땅 - 로버트 B. 파커] 멋지다 스펜서 (0) | 2016.06.0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