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오군란에서 해방까지
단순히 위대한 작품이라고 말하기에는 박경리의 집념과 노력에 대한 실례가 아닌가 싶다. 무려 17년간 집필해 나간 이 작품은 임오군란부터 해방까지의 시간 속에서 민족의 여러 계층의 고난을 그리고 있다. 최참판댁이라는 전통적 지주의 흥망성쇠를 기본 축으로 하고는 있으나 그 주위의 여러 계급들의 갈등들이 복잡하게 어우러진다. 일제강점기라는 시대적 배경이 압제자인 일본과 대항하는 조선인의 관계를 그리도록 하고는 있지만 그 외에도 수많은 계급적 투쟁, 전통과 신문물과의 부딪힘, 유고적 가치의 종말 등 시대적 변혁이 숨막히도록 빠르게 일어난다.
최치수의 죽음이 가른 운명
평사리의 최고 부자인 최참판댁. 당주 최치수에게는 아들이 없이 외동딸 최서희만이 있다. 한편 최참판의 아내 별당아씨가 최참판의 배다른 동생 김환과 달아난다. 최치수는 아집을 부려 그들을 말려 죽일 계획을 세운다. 한편 최치수의 재산을 탐내는 이들과 양반 신분을 질투하는 이들이 작당하여 최치수를 살해하니, '토지'의 시작이다. 최치수의 가짜 아들을 나아 재산을 가로채려는 칠성이와 귀녀, 김평산. 최치수 살해에는 성공하나 재산은 오롯이 먼 친척인 조준구에게 넘어간다. 이 일을 시작으로 평사리 내의 여러 인물들의 운명이 갈린다. 어떤 이는 살인자의 자식으로 낙인찍혀 평생을 망나니이자 일제 압잡이로 살게 되고, 어떤 이는 부끄러운 아버지를 둔 죄책감에 시달린다. 누군가는 독립운동가가되기도 하고 복수만을 꿈꾸기도 한다. '토지'가 끝날 때까지 박경리 작가의 운명론적인 가치관이 지속적으로 드러난다.
'돌아간다! 돌아가서 조가놈! 홍가 그 계집! 마지막 살에 붙인 내의까지 벗게 할테다! 내 소망은 바로 눈 앞에 와 있어. 내 주저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서희의 양 볼이 파아랗게 질린다. 증오와 저주의 바다다. 조준구와 홍씨의 두 물기둥이 솟아 오른다. 연속적으로 최참판댁을 엄습해 왔던 불운의 씨앗들이 두 물기둥 둘레에서 맴을 돈다.
투쟁의 역사
단순히 최서희가 재산을 되찾고 조준구에 복수하는 이야기라면 단순했으리라. 그러나 토지는 기본적으로 시대 변혁이 가져온 모든 종류의 투쟁을 다루고 있다. 먼저 최치수의 투쟁. 최치수는 전통적 지주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권위의 상징.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그 권력이 상민들에 의해 무너진다. 일제에 조선이 무너진 것 처럼. 그 다음의 투쟁은 양반과 상민, 백정의 투쟁이다. 백정의 사위인 송관수와 그의 아들 송영광이라는 인물을 통해서 교육을 받은 천민이 양반과 대등해져 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여성 운동이 있다. 주인공 격인 서희뿐만 아니라 이야기의 대부분에 여성이 등장한다. 그것도 중요한 위치로. 그들의 특징은 욕망을 가지고서는 그것을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투쟁을 한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사는 임이네, 전통적 여성 역할을 거부하는 강선혜와 명희, 인실. 그리고 군림하고 극기하는 최서희가 있다. 마지막 투쟁은 계급, 이데올로기의 투쟁이다. 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떠오르면서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와의 투쟁이 극렬해진다. 그리고 이 모든 투쟁의 상위에는 일제와의 투쟁이 있다. 이야기를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인물인 김길상은 위치와 역할이 모호한데, 이러한 갈등과 투쟁 사이에서 어떤 입장에도 서지 않고 핍박만 당했던 대다수의 인물을 상징한다. 조선인 그 자체인 김길상. 그는 그 누구도 될 수 없이 허공에 떠 버린다. 일본이 항복한 그 순간에도 감옥에 있었던 건 5년 후에 다가올 비극을 간접적으로나마 암시한다.
양반도 아니요 상민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남편도 하인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부자도 빈자도 될 수 없었던 김길상, 애국자도 반역자도 될 수 없었던, 왜 김길상은 허공에 떠버렸는가. 그것은 서희의 가진 것과 서희의 소망의 무게 탓이다.
애기씨 어릴 적에 나무를 깎아서 신랑 신부 양반 상놈 기생에다 종놈, 뜻대로 소원대로 다 만들어 드리긴 했습니다만 난 나무토막이 아니오! 피가 통하고 썩는 살점을 가진 사람이란 말입니다! 최서희! 당신하고 똑같은 사람이란 말입니다!
악한 일본, 악한 조선인.
이야기가 간도로 이동한 후부터는 일제에 대한 투쟁이 주가 된다. 특히 간도에서의 삶, 일제의 억압이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게다가 당시 지식인들, 나름 조선에서의 상위집단들이 어떻게 살고 있었는지 잘 보여 준다. 특히 간도에서 독립을 위해 선택한 방법은 교육이다. 이 교육으로 인해 많은 상민들의 자손들이 지식인으로 거듭난다.
결국은 순결한 마음, 순결한 열정만이 저어 수만리 장천을 날으는 철새처럼 목적한 곳에 당도할 수 있는게요. 그리고 왜놈이 망하여 내 땅에서 물러가는 날도 멀고 험난하니 우리는 우리 당대만을 생각해서는 안 되지요. 우리가 싸우다 죽으면 우리의 아들 딸들이 독립 정신을 이어주어야 하고 양전옥답 물릴 어리석은 생각 말고 피땀나게 자손들을 가르쳐야 하는 게요
토지에는 굉장히 독특한 점이 있는데 악한 일본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정신대문제, 강제 징용, 징병, 창씨개명, 조선인 차별, 일제가 저지른 압제들은 가감없이 등장하지만 개인으로서 악한 일본인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조선인들은 악한 이들이 많이 나온다.
어떤 경우에도 탐욕에는 사랑이 없어. 그렇게에 절대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방패가 필요하지. 효도이든, 충성이든, 의리이든, 그것을 십분 이용하는 거지. 가질 수 있는 한 다 가지려는 거지. 철저한 착취거든. 종에게 피죽 먹이듯, 그래야 소유를 확인할 수 있는 심리, 불효자식으로 만들어놔야 마음을 놓고, 의리없는 놈이다 하는 것이나, 역적이다 역적이다 하는 것이나 그게 다 방편을 위해 묶어두려는 협박일 때 그 같이 추악한 건 없을 게야. 무섭지.
혈육같이 짙고 강했던 동포들 사이의 유대를 지금 이곳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간도요 이곳이 조선이기 때문에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니라. 핍박도 지나치면 인성을 마비시키는가. 차츰 죄어드는, 차츰 그들의 수요가 많아지는 대일본 제국의 힘. 어느 곳에 가도 그것을 목격할 수 있고 느낄 수 있다. 서로가 서로를 회피하는 경향, 무관심해지는 경향.
아마 박경리는 개인은 평범할 뿐이지만 군국주의라는 국가 이념이 사회를 미쳐 돌아가게 만든다 진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오가다와 인실, 조찬하와 쇼지라는 아이를 통해 조선인과 일본인이 다를바 없음을 보여주려 한다. 일본이 나쁘지 개인은 죄가 없다는 앞선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는 조국을 배신하는 친일파에 있다고 보았다.
"그 순수한 친일파들이 누구보다 먼저, 강하게 탈출에의 유혹을 느낄거라, 저 생각은 그렇습니다."
"그들이 살아남는 비밀이 뭔지 아십니따? 힘의 무게를 다는 아주 정확한 저울을 가지고 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순수한 친일파들이 독립국의 뒷돈을 대주고 있는지, 형세 보아가며 대한독립 만세! 하고 외치며 뛰어나왔다가 몇 달 구류 살고 그런 뒤 조선이 독립될 그날 길이 좁아라며 거리를 활보할 궁리를 하고 있는지, 그건 모를 일이지요. 가장 지혜롭고 영악하게 사는 사람들, 어디든 적응하는 식물같이 끈질기게, 본시 생물은 다 그렇게 하게 되어 있는지 모르지만, 나는 사람이다! 해봤자 별 무소득이지요"
그리고, 적극적인 친일파는 아니지만 시대적 아픔을 외면한 상류층에도 냉소를 보낸다.
기본적인 반일 감정은 있겠지만 젊음의 아름다움, 빈곤을 모르는 계층, 그들은 세상이 자신들을 위해 있다는 것으로 착각했고 조선 민족의 1프로에 해당하는 특혜적 존재가 민족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가를 아직 모른다. 철없는 아가씨들.
'토지'로 보는 시대
'토지'에는 대충 헤아려 봐도 20가족이 넘는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인물로는 600명. 이들의 얽히고 섥힘이 편안한 독서의 장애물이 되기는 하지만 그 많은 인물들이야 말로 당시 시대를 다양한 각도에서 바라 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는 그들을 통해서 당시 시대를 다시 한번 살아보는 착각을 가진다. 세밀한 묘사와 감정적인 동질감, 입체적인 인물 성격이 암흑의 50년을 짧은 시간 안에 겪게 한다. 조선이 해방 되던 그 마지막 문장에서, 서희의 쓰러짐을 드러내는 그 문장에서, 함께 아찔함을 느낀다.
외치고 외치며, 춤을 추고, 두 팔을 번쩍번쩍 쳐들며, 눈물을 흘리다가는 소리내어 웃고, 푸른 하늘에는 실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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