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꺼삐딴 리] 기회주의자가 살아가는 법

슬슬살살 2016. 8. 24. 22:00

캡틴의 러시아식 발음인 '꺼삐딴'. 유명한 외과의사인 이인국 박사는 미국으로의 이민을 계획하고 있다. 이제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 이 위험한 조국 대신 미국으로 건너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이인국 박사가 대사관의 브라운에게 줄 골동품을 챙기며 과거를 회상한다. 일제시대, 대표적인 친일 인사로서 남부럽지 않던 그가 맞이한 첫번재 위기는 독립이었다. 해방을 맞은 조선, 그리고 불어닥친 친일파 숙청 작업에서 이박사가 자유로울리 없다.

 

'국어 상용의 가'
해방되던 날 떼어서 집어 넣어 둔 것을 그 동안 깜빡 잊고 있었다. 그는 액자의 뒤를 열어 음식점 면허장 같은 두터운 모조지를 빼내어 글자 한자도 제대로 남지 않게 손끝에 힘을 주어 꼼꼼히 찢었다. 이 종잇장 하나만 해도 일본인과의 교제에 있어서 얼마나 떳떳한 구실을 할 수 있었던 것인가. 야릇한 미련 같은 것이 섬광처럼 머릿속을 스쳐갔다.

 

친일파로 처단되기 직전, 타고난 의술로 러시아 장교를 치료한 것이 연이 되어 대표적 친러인사가 된다. 그리고 1.4 후퇴때는 러시아로 유학간 아들 조차 버리고 남하해서 이제는 다시 미국인으로서의 삶을 준비한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얼마나 많은 지식인들이 이런 과정을 거쳤을까. 난세라고는 하지만 묵묵히 고난을 버텨온 민초들에 비해 소위 '식자'들은 이러한 말 갈아타기를 서슴치 않았고 이는 우리나라의 가치관을 근본없게 만든 원흉이다. 그러나 이런 꺼삐딴 들을 단순히 변절자라 매도할 수만 있을까? 시대의 아픔을 개인이 짊어지는 일은 훌륭한 일이지만 그렇지 않다 하여 그 개인을 욕되게 할 수는 없을 듯 하다. 다만 그들이 역사를 직시 하지 않고 변칙적인 삶을 산 일은 단죄할 일이다. 친일파가 미운 것이 아니라 친일파를 단죄하지 못하는 현재에 실망한다. 미국으로 탈출하는 이인국 박사의 뒤가 쓸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