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은 지금도 강대국이지만 16세기의 위상은 그야말로 어마어마 했다. 이런 강대국의 행보에 거침없는 비판과 풍자를 내던진 작가가 조너던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의 저자다. 물론 영국과는 앙숙인 아일랜드인이기는 하지만, 영국을 향해 이정도의 조롱을 던진다는 건 상당한 강심장이 필요했으리라. 이 작품을 접한 영국의 지도자들은 얼굴이 상당히 화끈 거렸을게다.
<걸리버 여행기>라 하면 소인국과 거인국을 여행하며 겪는 재미있는 에피소드로 떠올리기 쉽지만 소인국은 영국의 축소판으로 외국이 봤을 때 한심하기 그지 없는 국가다. 재주넘기 따위의 말도 안되는 짓거리로 관료를 뽑고, 계란을 깨먹는 방향 때문에 긴 전쟁과 내전을 치룬다. 왕과 왕비는 나름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허례 허식과 근본 없는 전통으로 꽉 막힌 면도 있다. 대신들 사이에는 암투가 벌어지고 있으며 이를 위해 자국의 이익을 등한시 하기도 한다.
당초 소인국 이야기를 쓸 때에는 단순히 외국인의 시각으로 영국을 풍자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소인국 이야기의 인기 이후 조너던은 거인국을 통해 이상적인 나라를 그려보고자 했다. 거인국 입장에서 보면 문명인이라는 걸리버의 국가는 너무나 왜소하고 보잘것 없는 존재다. 거인국에서 걸리버의 문명은 조롱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심지어 거인들의 왕은 너무나 합리적이고 명석하고 자비로와 걸리버 스스로의 마음까지도 작게 만든다.
나의 조그만 친구여, 자네는 자네 조국에 대해서 칭찬을 했네. 고관이 될 조건은 사악한 마음씨라는 점을 입증해주었네. 법을 악용하는 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재판관이 된다는 사실도 입증해 주었네. 자네 나라에서는 어떤 제도가 시작은 훌륭했지만 결국에는 부패로 인해서 빛이 바랜 걸로 보이네. 자네가 말한 것으로 볼 때 어떤 사람이 어떤 지위를 얻는데는 그 방면의 학식으로 얻는 것 같지도 않고, 귀족들은 훌륭한 인격 때문에 귀족이 되는 것 같지도 않고, 성직자들은 신앙심이나 학식으로 인해서 진급하는 것 같지도 않고, 군인은 국가에 대한 충성심으로 진급하는 것 같지도 않고, 의회의 의원들은 애국심으로써 그 자리로 올라가는 것 같지도 않네.
이후 하늘의 나라 라퓨타에서는 과학만 맹신하고 정작 실생활은 나몰라라 하는 과학자들과 실용주의자들의 모습을 보여 준다. 이들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고 단기 기억 상실에 걸려 있는 우스운 꼴을 하고 있다. 실용적인 과학보다는 오로지 천문학과 수학에 치우친 자들을 통해 당시의 모습을 비판한다. 마지막으로 말의 나라. 조너던이 그린 이상세계다. 대부분의 유토피아가 인간을 중심으로 돌아가는데 반해 이곳에서는 인간이 추악한 생물이고 말들은 고귀한 존재로 그려진다. 모두가 어울려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계를 인간과 전혀 다른 말들의 국가로 대체한다. 이쯤 이르면 조너던이 인간혐오를 가지고 있던 건 아닐까 싶다.
영국에 대한 시대적 배경지식이 없이 <걸리버 여행기>를 읽는 건 사실상 겉핥기에 불과하다. 다만, 걸리버 여행기를 단순히 소인국과 거인국의 여행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는 그 겉핥기 마저도 신선하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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