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임꺽정] 깡패가 세상에 뱉는 침

슬슬살살 2016. 9. 15. 20:18

의적과 강도

"나는 함흥 고리백정의 손자구 양주 쇠백정의 아들일세. 사십 평생에 멸시두 많이 받구 천대도 많이 받았네. 만일 나를 불학무식하다고 멸시한다든지 상인해물한다고 천대한다면 글공부 안한것이 내 잘못이구 악한 일 한것이 내 잘못이니까 이왕 받은 것보다 십배 백배 더 받더래두 누굴 한가하겠나. 그 대신 내 잘못만 고리면 멸시 천대를 안 받게 되겠지만 백정의 자식이라구 멸시 천대하는 건 죽어 모르기 전 안 받을 수 없을 것인데, 이 것이 자식 점지하는 삼신할머니의 잘못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가문 하적하는 세상 사람의 잘못이니까 내가 삼신 할머니를 탓하구 세상 사람을 미워할 밖에. 세상 사람이 임금이 다 나보다 잘났다면 나를 멸시천대하더래두 당연한 일로 여기구 받겠네. 그렇지만 내가 사십 평생에 임금으루 쳐다보이는 사람은 몇을 못봤네...."

 

임꺽정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은 있을 수 있어도 그의 직업을 모르는 이는 없다. 도둑. 의적. 우리는 임꺽정을 신분제의 고통 속에서 떨쳐 일어나 자신의 운명에 저항한 의적으로 알고 있다. 진짜 그럴까. 홍명희의 <임꺽정>에서 그려지는 임꺽정과 청석골의 동지들의 모습은 특별하기는 하지만 결코 의롭지는 않다. 그들은 탐관오리라고 해서 특별히 약탈을 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산을 틀어막고 세를 과시하며 오가는 이들을 털어먹는 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죄없는 양민이라도 본인의 목적에 따라 때려 죽이고 불을 지르고 겁탈하고 약탈한다. 무능한 국가가 그들을 잡지 못하는 것이 한심하기는 하지만 청석골패의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지는 못한다.

"오냐, 어디 해 보자. 네가 나를 죽이기밖에 더하겠느냐? 내가 네 손에 죽지 않으면 내 손으로 자결해서라도 죽지, 뒷방에서 천덕꾸러기 노릇하고 살지 않는다. 첩도 안 얻겠다던 놈이 본기집이란게 자그만치 셋씩이야? 본기집 명색이 한꺼번에 셋씩 넷씩 되는 법이 어디 있더냐 이놈아! 지금은 부모 거상을 삼 년 씩 입는 세상인데 너 혼자 옛날 법이라고 스무이레 입고 시지부지 그만두더니 상제 복색 입고 기집질하기 거북해서 미리 고만두었느냐?"


주인공인 임꺽정은 백정의 혈통을 타고나서 세상에 울분이 가득한 장사이기는 하지만 리더로서의 자질이 떨어진다. 명철한 두뇌도 없고 공평한 지도력도 없다. 앞을 내다보지도 못하고 비전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야말로 힘만 있는 깡패 같은 인물이다. 임꺽정의 모습 어디에서도 히어로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임꺽정>의 재미는 영웅에 대한 대리만족보다 90년대 초반의 한국 조폭영화를 볼 때의 낄낄대는 즐거움에 더 가깝다.

 

청석골의 일곱 두령
무려 10권에 이르는 장편이지만 정작 임꺽정은 5권 이후에서나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 전까지는 임꺽정의 부모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그리고 청석골로 모이는 일곱 두령의 뒷이야기들 만으로 이야기의 절반을 채운다. 그럼에도 지루하지 않고 할머니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 같은 느낌이 강하다. 등장인물을 살펴 보면,

 

먼저 임꺽정.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난 천하장사다. 우연한 기회에 검술과 기마술을 배워 무력으로는 꺽을 이가 없지만 머리와 배려심이 부족하다. 저돌적인 인물로 자신만 아는 이기주의자. 양반에 대한 분노로 가득차 있지만 거꾸로 약자에 대한 배려도 없는 악당에 가까운 인물이다. 세간의 인식과는 가장 다른 점이 이 포인트. 화살의 달인인 이봉학은 벼슬까지 치르지만 역시나 모함을 받아 관직을 뺐기고 청석골에 합류한다. 박유복은 아버지의 복수를 벼르고 있는 장사로 이봉학과 함께 임꺽정의 어린시절을 함께 했다. 주특기는 표창. 배돌석은 이봉학과 함께 전선에서 공을 세웠지만 질투하는 상사를 때려 죽이고 청석골에 들어왔다. 돌팔매를 잘한다. 황천왕동이는 임꺽정의 처남으로 백두산에서 나고 자랐다. 축지법을 쓴다고 알려질 정도로 빠른 발이 주특기. 장기에도 적수가 없다. 곽오주는 그야말로 망나니. 원래 우직하고 막가파 같은 성향이 있었으나 아이와 아내를 단번에 잃고 나서 미치광이가 되었다. 우는 아이만 때려 죽이는 난폭한 성정. 마지막으로 길막봉이 있다. 임꺽정 다음 가는 장사로 씨름을 잘 한다. 마지막으로 의형제는 아니지만 청석골패의 머리 역할을 하는 모사꾼 서림이 있다. 원래 관가의 인물로 머리가 비상하지만 횡령을 하다가 걸려 도망치던 중 청석골패에 붙잡힌다. 이후 패에 합류해 특유의 머리를 이용해 작전참모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다. 곽오주와는 물과 기름 같은 관계로 계속해서 부딪힌다. 임꺽정에게는 신임을 얻지만 결국 꺽정이 패를 배신하고 관군의 앞잡이가 된다.

 

소설 <임꺽정>의 매력은 수많은 등장인물들과 바닥부터 긁어모은 에피소드들에 있다. 일곱 두령이 한데 모여 도둑패를 결성하고 이런 저런 일들을 벌이지만 결국 배신자로 인해 토벌 당한다는 심플한 스토리라인을 기본으로 하면서 수많은 곁가지들로 풍성함을 만들어낸다. 각 두령들에 얽힌 이야기들, 임꺽정의 오입질, 관군의 이야기까지. <임꺽정>은 정의롭지는 않지만 세상에 불만을 가진 민초들의 날 이야기이다.

 

미완의 결말
안타까운 건 <임꺽정>의 마지막을 읽을 수 없다는 점이다. 홍명희 작가는 임꺽정의 마지막을 청석골이 불타는 것으로 끝내 버렸다. 어차피 설원을 헤메이다 서림의 계략으로 임꺽정들이 토벌 되는 결말이겠으나 정확히 매듭지어지지 않은 마무리가 아쉽다. <임꺽정>은 의를 행하는 이들에 대한 동경 대신에 세상에 대한 분노를 대신 내보내는 욕설 같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