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폐허] 야금야금 고통을 가하고 서로를 이간질 시키고.. 스테이시, 죽어버리는게 낫지 않겠니?

슬슬살살 2016. 9. 16. 20:49

세상이 많이 변했다. 스티븐 킹이 전부인 줄만 알고 있던 3040 나이먹은 세대에게 신선함이 수혈된다. 머리로 향하는 혈관은 조 힐이, 심장으로 향하는 길목은 스콧 스미스가 맡았다. 러브 크래프트 식의 알수 없는 것에 대한 공포도 무섭지만 진정한 공포는 현실에서 나온다. 알면서 대응할 수 없는 무기력함. 문명과의 단절. 무시무시하다. 여기에 뿌려지는 작은 희망이 공포를 증폭시킨다. 스콧 스미스는 이 책을 공포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 엘리자베스에게 바쳤다. 공포를 이해할 줄 몰라도 한글만 안다면 이 책에서 엄청난 공포를 마주 할 것이다. 무언가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고 도망갈 곳 없는 그 장면 장면에서, 그 끔찍함의 한복판에서 탈출 경로 대신 '나같으면 그냥 죽어 버리는게 낫겠어'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처참한 공포. 신예 스콧 스미스의 공포는 그런 부류다.

 

정글 한 가운데에 있는 언덕을 오르다가 우뚝 멈춰선 지금, 그토록 괴롭히던 어색한 느낌을 받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게 또렷하게 예측 가능하기만을 바랐다. 누가 나와서 벌레들이 왜 사라졌는지, 마을 남자들이 왜 언덕으로 올라가도록 강요했는지, 왜 그들은 저 아래에서 아직도 무기를 손에 쥔 채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려주면 좋겠다고 여겼다.

 

젊은 남녀 커플들과 모험심 강한 독일인, 여행에서 만난 쾌활한 그리스인이 폐허로 향한다. 목표는 낯모른 여자를 쫒아간 마티아스(독일인)의 동생을 찾는 것. 그들은 마야인들이 성지로 여기는 언덕에 갇히게 된다. 마야인들은 그들이 내려오는 것만을 경계할 뿐 직접적으로 죽이지 않는다. 언덕 위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식물들. 무섭게 씨앗을 내리고 번식하는 그들은 상처 속에 자리 잡고 뱀처럼 움직이기까지 한다. 안쪽은 산성 물질이 있어 걷어낼 때마다 화상을 입어야 하는 무시무시한 존재가 언덕에 또아리 틀고 있다. 이 언덕에서 그들은 얼마나 살아 남을 수 있을가.

 

소설 <폐허>에서 공포의 대상은 식물이다. 특정 지역에만 또아리 틀고 있는 그것들은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그것이야말로 여기에 딱 어울리는 어휘였다. 이런 짓을 해놓은 정체는 꽃을 피우는 덩굴이었다. 녹이 슬게 한다거나 부패시키는 소극적인 힘이 아닌, 적극적인 힘을 가진 존재라는 걸 제프는 깨달았다.

 

그 뿐 아니다. 그것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심지어 말도 한다. 휴대전화 벨소리를 흉내내서 제프 일행을 꼬드기는 장면은 정말이지 지옥의 모습이다. 이 식물들은 강력한 번식 능력으로 사람을 잡아먹는데 그치지 않는다. 야금 야금, 희망 고문을 하고 스스로 절망에 빠지도록 유혹하고 심지어 그걸 즐긴다는 점에서 악마의 모습 그대로다.

 

문명과의 거리가 눈 앞에 있다는 것도 공포 요소. 미개한 것으로 나타나는 마야인들이긴 하지만 화살로 무장한 그들은 평범한 남녀 일행은 절대 넘을 수 없는 장벽이다. 언덕에서 살아가야만 하지만 작은 상처 하나도 파고 들어오는 그 식물들은 야금야금 고통을 가하고 서로를 이간질 시키고, 극한의 고통을 부여한다. 500페이지가 넘는 페이지가 그리고 있는 '폐허'에서의 1주일. 나에게는 하룻밤에 불과한 시간 동안 책 속의 주인공들이 겪는 고통이 온몸으로 전해진다. 무기력함을 온 몸으로 전하는 소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공포스러운 밤. 이제 스티븐 킹을 잊을 때가 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