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재난
얼핏 생각하면 재난물과 생존물은 유사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큰 차이가 있다. 재난물은 외부의 변화로 인해 닥친 어려움을 극복하는 걸 기본으로 하고 있다. 대부분은 어려움을 극복한 인간들의 생존력에 감동하는 식의 전형성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나 일부 영화에서는 인간성을 상실한 인물들 -예를 들면 좀비물에서 약탈자들이라던지-을 통해 인간의 악함을 조망하기도 한다. 생존물은 이보다 더 인간을 확대해서 들여다 본다. 생존이라는 일차원적인 욕구에 맞닥뜨린 인간이 벌이는 사투는 필연적으로 인간성의 상실을 동반한다. 오줌을 받아먹거나, 인육을 먹어가며 생존하는 식으로. 생존물에서의 주인공은 어쩌면 재난물에서의 약탈자일런지도 모른다.
고립, 분열
'터널'에서의 재난은 고립이다. 터널이 무너지면서 순식간에 인간의 세상과 단절된 이정수(하정우). 이를 세상과 연결하는 건 라디오의 클래식 채널과 휴대폰이다. 금방 구조될 것으로 믿지만 그 믿음은 오래 가지 못한다. 적어도 2주. 물 몇통과 케익으로 2주를 버텨야 하는 상황. 그래도 강인한 정신력의 이정수는 버텨 나간다. 터널에 함께 갇힌 여성이 죽을 때도, 소중한 물과 식량을 개가 축낼때도 꾸역꾸역 희망을 잃지 않고 버틴다. 절망의 상황에서 자신의 생존 전략을 묵묵히 실행해 나가는 이정수와 달리 바깥의 세상은 좀 복잡하다. 전문성 없이 관계기관끼리 잘 협의해서 결정하라는 장관, 이정수의 아내와 기념촬영을 요구하는 관료들, 경제적인 논리로 구조계획을 포기하자는 지자체, 구조보다 시청율이 우선인 언론인까지. 영화 <터널>에는 낮부끄러운 진실들이 적나라하게 축약되어 있다. 그 분열 중에서 가장 압권은 구조대의 죽음이다. 어이없는 사고로 인해 구조대원 중 한명이 죽자 그 화살은 이정수의 아내(배두나)에게로 향한다. 그녀 역시 어이 없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그녀의 잘못인 양.
<터널>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분열이다. 터널에 갇힌 것은 불운한 사고이지만 공포는 외부의 분열에서 기인한다. '나'를 구조해야 할 사회와 국가가 '나'를 외면할 때의 끔찍함이란. 게다가 '나'의 구조에 대한 여론의 분열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회의를 들게 한다. 더욱 끔찍한 건 이런 일들이 불과 2년전 우리가 겪었던 일이라는 것.
인간, XXX
우리는 인간이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배워왔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일순위 가치가 아니다. 시청률, 기록 사진, 몇백억의 손실에 비해 너무나도 후순위인 인간의 가치. <터널>을 통해 바라본 대한민국은 너무나도 후진적인 현실이었다. <터널>은 그래서 특별한 생존영화다. 구조대장(오달수)만이 바깥에서 고군분투할 뿐, 정작 죽어가는 이정수에게 도움이 된 것은 라디오를 통해 간간히 전해진 가족의 소식 뿐이다. 도면대로 공사를 하지 않은 덕분에 잘못된 곳을 뚫었던 구조대의 모습은 편법과 부실의 우리 사회를 그대로 보인다. 최후까지 이정수는 생존한다. 그 과정에서 그 누구도 도움을 주지 않는다. 마지막, 이정수의 욕설은 스스로 살아남게 만든 이 엿같은 세상에 던지는 메세지다. 꺼져 이 xxx들아.
PS. 하정우의 연기야 검증되었지만 <터널>에서만큼은 배두나가 최고였다. 오히려 생존 그 자체로만으로도 정신 없었던 하정우에 비해 배두나의 연기는 복잡 미묘한 생존자 가족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줬다. 구조대원들에게 계란후라이를 돌리는 초췌한 모습은 그 어떤 장면보다 왈칵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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