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각사 방화
금각사는 교토에 실제로 있는 아름다운 절이다. 394년에 지어져 무려 1600년을 이어오다가 1950년 방화로 소실된다. 지금 있는 절은 복원 된 절. 교토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었을 이 사건의 피의자는 하야시 쇼켄이라는 젊은이로 나름의 엘리트 코스를 밟던 이였다. 이 사건이 소설로까지 쓰여진 이유는 동기가 명확치 않아서이다. 독선, 혹은 환각에 의한 방화로 보이지만 미시마 유키오는 다른 관점에서 이 사건을 바라본다.
내부의 낡은 금박도 그대로, 외벽에 칠한, 여름 햇빛에 빛나는 옻의 보호를 받으며, 금각은 쓸데없이 고귀한 가구처럼 묵묵히 서 있었다. 타는 듯이 푸른 숲 앞에 놓인, 거대하고 텅 빈 장식 선반, 이 선반의 크기에 맞는 장식품은, 터무니 없이 커다란 향로라든지, 터무니없이 방대한 허무라든지, 그러한 것들밖에 없으리라. 금각은 그러한 것들을 깨끗이 잃고, 실질을 즉각 씻어 버린 채, 이상하게도 공허한 형태를 그곳에 쌓고 있었다.
<금각사의 현재 모습>
전후의 탐미주의
나름 세계를 상대로 전쟁을 이어가던 일본이 항복하던 그 순간. 신으로 믿었던 일왕은 스스로 인간의 자리로 내려 앉았고 핵 한방으로 무너진 패배의 방식 또한 처참했기에 전후 일본인의 세계관은 급격하게 허무주의로 흐른다. 문학도 예외는 아니어서 극단적인 허무주의, 탐미, 유미의 관념이 열리게 되는데 미시마 유키오는 이 분야에서 그야말로 선두를 달리던 작가다. 1950년 있었던 금각사 방화 사건은 유키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아름다움의 정점인 실물, 금각사가 방화로 인해 한순간에 사라지는 일이 미(美)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도록 만든 것. 1600년간을 한자리에서 위용을 뽐내던 그 금각사가 한순간에 사라진다. 아름다움의 영원성, 불멸성에 물음표를 가지게 된다.
옛날부터 나는 여기에 있었고, 미래에도 영원히 여기에 있으리라
미에 대한 관능의 반항
극중에서 미조구치는 아름다움,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금각사에 투영하고 이를 파괴하는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보인다. 금각사뿐 아니라 자신의 어머니, 짝사랑하던 여인, 유곽에서 몸을 산 창녀에 이르기까지 그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은 파괴의 대상이기도 하다. 일종의 가학적인 쾌감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사랑하거나 동경하는 대상을 파괴함으로서 스스로를 오욕에서 해방한다는 착각을 일으키는 것. 극단적인 집착이 파멸에 이르는 과정이다.
인간을 장미꽃처럼 속도 겉도 없는 물체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러한 생각이 어째서 비인간적으로 보이는 것일까? 만약에 인간이 그 정신의 내부와 육체의 내부를, 장미의 꽃잎처럼 유연하게 뒤집어 감아서, 햇빛이자 5월의 산들바람에 드러나도록 할 수 있다면.
남천참묘
불교에 이런 설화가 있다.
어느날 동당과 서당간에 고양이 새끼 한 마리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자 남천 보원 선사가 고양이 새끼를 치켜들고 말하였다. "대중들이여, 도득하면 살리고 도부득하면 목을 베리라." 대중 가운데 한 사람도 대꾸가 없자 남천 선사가 드디어 고양이 목을 베어버렸다. 밤늦게 조주 스님이 외출했다가 돌아오자 남천 선사가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하니 조주 스님은 아무말 없이 짚신을 벗어 머리위에 이고 나갔다. 남천선사가 말하였다. "네가 있었더라면 고양이 새끼를 구했을 것을......"
미시마 유키오는 이 이야기의 고양이가 아름다움이자, 삶의 목적, 그리고 금각사라고 설명한다. 금각사를 불태운 것이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의 결과물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남천 스님이 베어버린 그 고양이가 예사롭지 않지. 그 고양이는 아름다웠단 말이야, 알아? 이를데 없이 아름다웠지. 눈은 금빛에, 털에는 윤기가 흘렀고, 그 작고 부드러운 몸에, 이 세상의 모든 향락과 미가, 용수철처럼 구부려진채 간직되어 있었지. 고양이가 미의 결정체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해석자들이 간과하고 있지.
결국 그것을 태워 버림으로서 스스로의 집착을 버리고자 한다. 금각사를 태워버린 미조구치의 마지막이 죽음이 아닌 삶으로 끝나는 건 집착을 태워버리면서 생겨난 삶의 방향성이 아닐까. 태워버렸을 때 오히려 채워지는 미조구치의 집착은 어딘가 불교적인 데가 있다.
'이건가? 고작 이런거였나? 나에게 끊임없이 통증을 주고, 나를 끊임없이 그 존재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며, 또한 나의 내부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죽어버린 물질에 불과하군. 하지만 그것과 이것이 정말로 같은 것일까? 만약 이것이 원래 나의 외부존재였다면, 어째서, 무슨 인연으로, 나의 내부와 연결되어, 내 통증의 근원이 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정말 예술은 영원하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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