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를 너무 나쁘게만 보지 말자. 유치해서 손발이 오그라드는 그 와중에도, 느껴지는 컬트적 느낌이 있으니. 그런점에서 '마신소환사'는 그런 컬트성을 완전히 갖췄다. 개연성 없는 설정, 구성, 팬픽에 가까운 무지함과 필력을 모두 갖춘... 그야말로 졸작임에도 이상한 매력을 가지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고등학생의 습작에도 미치지 못할 중2병 상상력을 배설해 놓은.. 그런 글 속에서 나는 아이의 조잘거림을 들어주는 너그러운 아비가 된다. 앞뒤가 맞지 않고, 지루하며, 창의적이지도 못한 그런 이야기지만 내 딸이 해주는 얘기라면 그 어느것보다 집중하게 된다.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다. 평범하고, 지루하며, 말도 안되고, 어디선가 본 이야기들을 늘어 놓을 뿐이지만 멋을 부리려 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얘기를 그대로 전달하기에 순수한 아이를 보는 듯한 글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서 또 어떤 사람들은 권력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산다고 하지만 결국 그것은 부와 명예, 권력을 통해서 그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모두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것이지요.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행복을 손에 넣을까요. 행복을 손에 넣었다 해도 과연 자신이 행복하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아마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거에요. 행복은 손에 넣는 것보다도 만들어 가는 그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것도요. 내게 신의 유산은 행복과 같은 거에요. 결코 찾을 수 없다고 해도 찾으려고 노력하는 순간들로 인해 내게 행복을 가져다 주는 그런 거요."
고작 스물도 안된 녀석이 세상을 다 산것 마냥 자신의 글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모습이 귀엽다. 나이에서 글힘이 생기는 건 아니지만, 이 글의 문장 속에 거창함을 넣으려고 머리를 끙긍 대는 모습이 그려진다.
글의 주인공은 시한부 소녀, 하연. 죽음을 앞두고 마신을 불러내고 소원을 빈다. 그 소원으로 시작된 또다른 세계 속에서의 모험. 그녀 주위로 왕가의 후손, 해적왕, 용병왕, 드래곤 따위가 매력에 빠져 모여 들고 모험의 사이즈는 크기를 더해간다. 좌충우돌 자기 하고 싶은대로 하는 하연과 그녀를 애지중지 둘러싼 능력자들의 이야기. 인류의 운명이니, 드래곤의 업보니, 종족 전쟁이니 하는 판타지 요소들을 늘어 놓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소녀의 판타지 상상일 뿐이다. 다만 그것이 꽤나 순정적이라 엿보는 즐거움 같은게 있다랄까.
내용은 별로 중요치 않다. 그냥 잠깐 중2병에 빠지는 것도 괜찮다 싶다. 최종적으로 하연은 목숨을 던져 혼 대륙을 구하고 그녀의 추종자들은 각자의 길을 걷는다. 환생한 하연이 자신을 숭배하는 혼 대륙에서 로베인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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