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20세기 고스트] 스티븐 킹의 둘째가 이어가는 공포의 연보

슬슬살살 2017. 1. 1. 19:56

30대라면, 영미문학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장르문학에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심지어 이 모든 것과 무관한 사람이라도..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을 듣는다면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다. 현대의 상업문학에서 스티븐 킹의 존재감은 엄청난거다. 발표하는 모든 작품이 영화로, 드라마로 팔려 나갔으며 글은 쓰나마나.. 신작이 나올 때마다 미국이 뒤짚히는 그런 작가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와 같은 장르에서 데뷔를 한다?!. 충분히 이슈가 될 만하다. 물론 아버지의 발 끝에라도 미칠 수 있다면..

 

20세기 고스트는 스티븐 킹의 아들 '조 힐'의 데뷔작이다. 표제작인 '20세기 고스트'를 포함해 16편의 짧은 단편들이 모여있는 이 책에서 조 힐은 아버지의 후광을 충분히 지워 낸다. 사실 이 이후에 나오는 장편 '뿔'이 훨씬 대단하긴 하다. 나 역시 이 작품 이후에 조 힐의 다른 책들을 찾게 됐고. '뿔'이 만들어지기 전초전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소품집이다. 물론 습작들 몇개도 포함되어 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은 없다. 조 힐의 작품은 독특하긴 하지만 특별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일반적인 상황, 평범한 사람, 배경 속에서 숨겨져 있는 근원적인 공포의 포인트를 극대화 시킨다. 스티븐 킹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보다 더 평범함을 추구한다. 거기에 젊은 작가들이 가지고 있는 한방을 곳곳에서 잘 써먹기 때문에 읽는 재미가 상당하다.

 

1. 신간 공포 걸작선

공포 소설 편집장이 놀라운 작품을 접하고 작가를 만나러 가서 겪는 공포를 다룬다. 실체가 없이 분위기만 고조시키면서 독자를 공포속으로 몰아 넣는 테크닉이 일품이다.

그는 자기를 쫒는 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일생 동안 그의 뒤를 쫒던 것이었다. 그는 자기가 이제 어디에 있는지를 알았다. 마침내 결말이 펼쳐지는 이야기 속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누구보다도 더 잘알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이 숲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바로 자기라는 것도.

 

2. 20세기 고스트

영화관에서 살고 있는 귀신에 관한 이야기이다. 약간의 공포 요소를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성장소설이다. 스티븐 킹의 단편 중 '시신'이라는 작품과 정서와 느낌이 비슷하니 비교해서 읽어 보는 것도 재밌겠다.

알렉은 여자에게 몸을 숙여. 여자는 얼굴을 들어 마주 향하고 눈을 감아. 아주 젊은 여자는 그에게 전적으로 몸을 맡기지. 알렉은 안경을 이미 벗고 있어. 그는 여자의 허리를 가볍게 잡아. 사람들이 꿈꾸는 키스, 영화에 나오는 키스 장면 그 자체야. 두 사람을 보고 있노라면 이 장면이 영원히 끝나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게 되지.

 

3. 팝아트

이 세번 째 작품을 읽고 나면 조 힐이 얼마나 재능 넘치는 작가인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공포와 판타지는 원래 한몸이지만, 이렇게 재기발랄한 판타지를 이 단편집 사이에 슥 끼워 넣을 생각을 했다니. 공기주입식 인형이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확히는 사람중에 공기주입식이라는 종류가 하나 더해졌을 뿐이다. 다른 모든 건 사람과 같지만 몸에 상처가 나면 공기가 빠져 죽게 되는.. 공중을 둥실 떠 다닐 수 있는 그런 존재. 그 존재의 이름이 아트라는 건 조 힐의 또다른 유머다. 조 힐이 바라보는 예술이란 건, 공기주입식 인형인거다. 늘 그리워 하는 친구이지만 어느날 갑자기 둥실 떠나버리거나 작은 것들에 상처 투성이가 되어 버리는 그런 것.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우주비행사의 삶을 살게 돼. 전혀 모르는 세계를 향해 우리가 살던 세계를 모두 뒤에 남겨두고 떠나야 해. 인생이란 그런거지. 

 

4.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
어릴 적 봤던 영화 중 가장 공포 스러웠던 게 '플라이'였다. 귀신이 나오거나 하는 것도 아닌데 점점 파리가 되어 가는 인간의 심리를 그려낸 그 작품. '메뚜기 노랫소리를 듣게 되리라'는 <플라이>가 펼쳐 보였던 시놉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점차 메뚜기로 변하는 소년. 난폭해지는 심성과 배고픔. 부모를 잡아먹은면서 느끼는 생존의 쾌감 같은 것들이 이 소설의 날섬을 보여준다.

 

5. 아브라함의 아들들
이번엔 흡혈귀의 이야기이다. 아니, 정확히는 흡혈귀를 해치운다는 망상에 빠진 인간의 이야기이다. 말뚝으로 사람들을 죽여 나가는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이 있다. 흡혈귀를 죽이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알수 없다. 진짜 흡혈귀인지, 아닌지. 계속되는 살인 속에서 그 진위를 알 수 없다는게 공포를 극대화 시킨다. 특히 마지막, 아버지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막스를 표현하는 문체에서 강하게 스티븐 킹이 보인다. 거친 욕설 사이에 야릇한 위트. 복수에 따르는 기묘한 쾌감까지.

결국 아버지가 지하실에서 해준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울부짖고 욕설을 퍼부으며 빠져나가려고 발광을 해도, 금방 끝나버렸다.

 

6. 집보다 나은 곳
일종의 정신착란 증세를 겪는 아이의 이야기. 다혈질 야구감독인 아버지와만 교감하는 그녀가 특수학교로 가게 된다는 내용인데, 특별한 에피소드 보다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일종의 습작으로 보인다.

 

7. 검은 전화
초자연적인 색깔을 강하게 연출하는 작품이다. 이 역시 스티븐 킹의 소설 '1408'과 '미저리'가 떠오른다. 가만 보면 조 힐의 첫번째 작품 집은 아버지에 대한 오마주로 점철되어 있는게 아닌가 싶다. 납치된 아이가 갇혀 있는 방. 그곳에는 검은색 전화기가 있다. 오로지 받을 수만 있는 그런 전화. 전화선이 연결되어 있지 않지만 벨이 울리는 전화. 피니보다 먼저 없어진 아이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전화. 전화기와 방, 단 두가지 소품을 가지고 소름끼치는 공포의 모습을 연출한다.

 

8. 협살 위기
이번에는 법적 관념 하에서의 공포를 그린다. 특별히 공포의 대상이 있지는 않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이 갑갑해지는 소설. 살인의 현장을 목격한 켄싱턴의 행동에서 그가 꼭 연쇄 살인범으로 몰릴텐데, 저렇게 행동하면 안될 텐데.. 하는 답답함이 강하지만 아무리 소리질러도 들을 수 없는 소설속의 인물이라니. 끔찍할 정도의 갑갑함을 보여주고 싶었나보다.

그는 2월의 어둠속으로 속삭였다. 뛰고 또 뛰었지만 고속도로에 가까워지는 것 같지 않았다. 다시 협살 위기에 처한 것처럼 무력감, 빠져나갈 수 없는 자리로 뛰어든다는 느낌이 덮쳐왔다.

 

9. 마법 망토
마법망토를 가지게 된 소년의 이야기. 어린 시절 망토를 입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 그리고 그게 진짜 현실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에릭이 자신의 망토를 돌려 입고 헤어진 여자친구를 찾아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로맨틱한 데이트. 그러나 에릭이 앤지를 떨어뜨려 죽이는 반전이 이어진다. 그리고 형 마저도 죽이겠다 결심하는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형과 내가 슈퍼히어로 놀이를 할 때마다 형은 언제나 내게 악당 역을 시켰다. 누군가는 악당이 되어야 한다.

 

10. 마지막 숨결
이 이야기는 스티븐 킹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더 생각나는 작품이다. 죽을 때 내뱉는 숨결을 모아서 전시하는 기묘한 전시관과 그걸 관람하는 손님. 그리고 자기의 어머님이 죽어 가는데도 천진난만하게 숨결 채취기를 챙기는 아이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잔혹함이 꽤나 강렬하다.

 

11. 나무의 유령

나무의 유령에 대한 스케치. 2장짜리 짧은 단편으로 이것도 일종의 습작처럼 보인다.

 

12. 과부의 아침식사

기차 히치하이킹을 한 불법체류자, 킬리언.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들어간 민가에서 환대를 받고 식사와 옷을 얻는다. 그리고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길을 떠나는 순간,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깨닫는다. 삶 속에 공포가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내가 좋아하는 놀이는 아닌것 같가. 난 죽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거든." 큰 아이는 눈을 깜빡 거리며 그를 훑더니 얼굴을 빤히 쳐다 보았다. "왜요? 벌써 의상도 다 입고 있잖아요"

 

13. 바비 콘로이, 죽은자의 세계에서 돌아오다.
좀비 영화의 전설인 새벽의 저주 촬영장에서 생긴 유쾌한 이야기를 상상하다. 그 좀비 분장을 하고 죽어나가는 엑스트라 중에 배우를 꿈꾸던 이가 첫사랑을 만난다는 상상. 그들이 로메로 감독의 눈에 띄어 가장 멋지게 죽는 연기를 펼치는 상상. 시체 분장을 하고 더듬는 추억은 어떤 걸까.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을 상상만으로 만나본다.

 

14. 내 아버지의 가면
가장 모르겠는 소설. 사이비 종교에 빠져있는 부모라고 추정되기는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아무튼 평범한 부모를 따라 가서 가면을 쓰고 이상한 의식을 치르고 아버지를 남겨 놓고 돌아오는 길. 집 밖에서 겪은 이상한 체험까지.. 야릇함이 따르기는 하지만 정확한 실체는 잘 알지 못하겠다.

 

15. 자발적 감금
자폐에 걸린 모리스는 상자를 쌓는 일을 한다. 일을 하는 것이 돈을 번다는 개념은 아니고 박스로 자신만의 공간을 꾸며 나간다는 뜻이다. 자폐인 대다수가 그렇듯이 모리스는 그 일에 빠져 있었고 보다 독특하고 보다 어려운 상자쌓기를 이어간다. 그리고 결국 초자연 적인 영역에까지 이르게 된다. 그가 쌓은 상자 미로를 헤메다 보면 어느새 탈출할 수 없는 순간이 온다. 조 힐이 이 이야기를 마지막에 배치 한 건 자신의 이야기도 모리스가 쌓는 상자처럼 되기를 바란 건 아니었을까. 펼쳐져 있을 때는 정신없는 환상으로, 접었을 때는 신기루 처럼 사라지는 그런 상자 미로.

나는 혼자 어둠 속을 밀고 헤쳐 나가며, 내 기억의 비좁은 공간을 나아가면서 좀 더 버틸 수 있다. 저 모퉁이 너머에 무엇이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어쩌면 저 앞 어딘가에 창문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창문 밖으로 해바라기 들판이 내다보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