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앙테크리스타] 나를 성장케 하는 '적'

슬슬살살 2016. 12. 10. 20:19

오후 네시, 적의 화장법, 살인자의 건강법, 이토록 아름다운 세살까지에 이어, 아멜리 노통브의 다섯번째 작품을 읽는다. 노통브식 언어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텍스트 사이에 숨겨진 말초적인 감각을 느낄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그녀의 글들은 생고기처럼 선홍빛을 띄고 있으며, 신랄하고 섹시하며 야릇하고 날카롭다. 호흡의 하나까지도 잘 벼린 칼처럼 예리하게 파고 든다. 그런 느낌을 전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의 평범함과 대비자의 비범함 사이에서 오는 실물적 괴리때문이다. 테제와 안티-테제라는 소설적인 대비를 가장 잘 써먹는 작가가 아닐런지.

 

앙테크리스타는 사춘기 소녀의 성장 이야기이다. 내성적인 성격의 평범한 아이인 블랑슈. 그녀가 그녀와는 다른 삶을 사는 크리스타와 가깝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타는 모든 면에서 블랑슈의 반대편에 서 있다. 섹시하고 매력적이며 본인이 가지고 싶은 것을 위해서 모든 것을 내던지는 아이. 가지고 싶다기 보다는 본능적인 파멸욕을 가진 아이가 블랑슈에게 접근한 것. 블랑슈와 달리 모든 면에서 매력적인 그 아이는 블랑슈의 모든 것을 파먹는다. 가족, 사랑, 그녀의 소중한 시간까지... 악마적이기까지 한 그녀에게 고통받고 삶의 끝자락까지 밀려난 블랑슈는 마지막 반격을 준비한다. 

 

크리스타는 앙테크리스타가 흉측한 만큼 예뻤다. 흉측하다는 형용사는 조금도 과장된 것이 아니다. 내게만 보여지는 멸시의 가면은 흉측했다. 그 가면의 의미가 흉측했다.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넌 나랑 격이 맞지 않는 애야. 네가 나를 돋보이게 하는데 소용되는 걸 행복하게 생각해. 넌 내 발깔개에 불과해. 그녀의 영혼 속에는 크리스타에서 앙테크리스타로 바뀌게 해주는 스위지가 있는게 틀림 없었다. 그 스위치에는 중간 위치가 없었다. 온(On)상태의 그녀와 오프(Off)상태의 그녀 사이에 공통 분모는 있는지 궁금했다.

 

소설의 중반까지 이어지는 크리스타의 집요한 공격은 진절머리가 난다. 어이없이 코너로 몰리는 블랑슈에게서 어린 시절 나약한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어쩔 수 없이 하게 됐던 거짓말, 슈퍼마켓에서 슬쩍 했던 사탕 쪼가리, 잘생긴 이에 대한 질투, 슈퍼맨이 되고자 했던 홀로의 상상, 예쁜 친구를 대상으로 했던 상상 속의 간음까지... 나 스스로의 추악하고 더러운 면이 모두에게 발가벗겨진다는 느낌. 크리스타의 공격은 이토록 집요하고 날카롭다. 이 모든 것이 이익이 아닌 본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보다 무섭다. 공포는 여기까지. 그토록 완벽해 보이던 크리스타의 거짓에 약간의 균열이 생기고 블랑슈는 반격을 준비한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 반격이 이 소설에서 가장 멋진 장면이다.

 

아르셰(archee)는, 다리가 미치는 거리를 보폭이라 하듯, 화살이 미치는 사정거리를 말한다. 이 말만큼 나를 꿈꾸게 하는 말도 없다. 이 말에는 끊어질 정도로 팽팽하게 시위가 당겨진 활과 화살, 그리고 무엇보다 시위가 당겨지는 숭고한 순간, 쏘아진 화살이 솟구쳐 날아가는 순단, 쏘아진 화살이 솟구쳐 날아가는 순간, 무한을 향한 지향, 그리고 활의 욕망이 제 아무리 강렬하다 해도 화살이 날아갈 수 있는 거리에는 끝이 있기 마련이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연한 실패, 한참 날다 멈춰버리는 활기찬 추진력 등이 내포되어 있었다. 따라서 '아르셰'는 멋진 비약이요,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를 내포하고 있으며, 한순간에 불타버리는 순수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블랑슈는 크리스타와의 아르셰를 정확히 재고 사정권 안까지 들어오기를 끈기 있게 기다린다. 블랑슈의 아르셰 안에 내딛은 크리스타의 발자국. 블랑슈의 화살은 정확히 그녀를 향한다. 크리스타는 자퇴하고 블랑슈의 삶에서 사라진다. 블랑슈가 되찾은 평온. 그러나 무시무시한 결과물이 남았으니, 블랑슈의 기억에 새겨져 버린 크리스타의 자취다. 부끄럽지 않았던 그녀의 작은 가슴은 수치스러워졌고 이를 가리기 위해 크리스타가 알려 준 마사지를 하는 블랑슈. 그녀의 육체는 이미 크리스타의 뜻을 수행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렇게, 그녀의 뜻은 이루어 졌다. 내 뜻이 아니라.

 

아멜리 노통브에게 있어 '적'은 나를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고난이자 성장하게 하는 위협이기도 하다. '적'을 통해 아프고 성장한다는 단순한 이치를 노통브의 레토릭으로 섹시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