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안그러면 아비규환] 동화, 공포, 스릴러, 판타지까지. 거장들의 펄프픽션

슬슬살살 2017. 2. 24. 23:01

장르물이라면 단편이다. 환상적인 이야기, 독특한 상상일 수록 길어지면 헛점이 생기는 법이다. '안그러면 아비규환'은 당대 최고의 장르물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일종의 문학잡지 개념의 책이다. 장르문예지의 창간호 같은 느낌이라면 딱 적합하다. 작가들 면면을 보면 그 하나하나가 이름만으로 백만권씩은 보장되는 인물들이니 이 기획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스티븐 킹, 마이클 크라이튼, 닉 혼비, 릭 무디...그야말로 장르물의 작가 어벤저스다. 외계인이 글로 쳐들어온다면 이 책으로 막을 수 있을 듯. 개인적으로는 스티븐 킹이라는 이름이 이 책을 빼들게 하기는 했지만 정작 이 책의 탑 오브 탑은 표제작인 '안그러면 아비규환'의 닉 혼비다.

 

미래를 볼 수 있는 비디오를 소유하게 된 주인공. 로또를 미리 보거나 내일 날씨를 알 수 있고, 주식을 살 수 있을꺼다. 그러다가 계속해서 돌리다 어느 시점에 모든 방송이 중지되고 뉴스만 하고 있다면 어떨까. 사람들이 대피하고 음식점은 털리고 테러가 일어나다가 어느 순간, 그 뉴스마저 나오지 않는 걸 보게 된다면. '안그러면 아비규환'은 멸망의 시점을 알아버린 사춘기 소년의 이야기다. 그 소년은 따로 탈출 계획을 세우거나 멸망을 막아보겠답시고 CSI에 알리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반 최고의 퀸카에게 그 비디오를 보여주고 함께 멸망 전에 하고 싶었던 일 - 가령 섹스라던가 -을 하게 된다. 삶에 대해 아무런 미련도 없는 듯 비꼬는 말투로 이어가는 느낌도 센스있다. 전체적으로 굉장하다라는 인상을 받는다.

 

단순히 환상소설만 다루지는 않는다. 공포부터 추리, 심지어 동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의 장르를 단편으로 다루고 있다. 짧아서 편하게 읽힌다는 장점 외에 다양한 문체와 시도를 한꺼번에 접할 수 있기에 이런 류의 책은 늘 즐겁다.

 

'어둠을 잣다'도 독특한 작품이다. 눈이 멀어가는 여자 주인공의 시선에 초점을 맞춰놓고 일상적인 이상함 -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이 이상하게 많이 나온다는 - 을 발생 시킨다. 그리고는 점점 한쪽으로 방향을 몰아간다. 마치 옆집에서 대마를 키운다는 것 처럼. 그리고 거기에 접근 하는 눈먼 여인. 점점 분위기가 고조되는 그 순간에 터져나오는 주인공 수즈의 대사는 상황을 반전시키면서 어이없는 실소를 짓게 만든다. 그리고 한번 더 곰씹으면 그 뒤에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해 보게 된다.

 

"당신들이 우리 집 전기와 물을 꽤 많이 썼는데," 수즈가 말했다. "수확이 끝나면 나하고 거래할 생각이 있는지 궁금하군요."

 

이런게 단편의 힘이 아닐까. 한방에 보내는 힘. 물론 모든 작품이 다 만족스러운건 아니지만 꽤나 그럴싸 한 소설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