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일까. 전년도 수상작과 유사한 구성을 취하고 있는 것이. <슬롯>은 세계문학상의 세번째 수상작품이다. 전년에 수상한 <아내가 결혼했다>가 축구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교묘하게 교차해서 재치있는 구성을 보여줬는데 그 다음해에 비슷한 구성의 작품이 대상을 받는다는 건 누가 봐도 이상하다. <슬롯>은 카지노와 관련한 몇가지 에피소드와 회상, 프로 겜블러의 회고록 등을 통해 주인공이 겪고 있는 상황과 현실인식을 도박과 연결 짓는다. 잘 쓴다면 재치있지만 자칫하면 구태의연하고 허세스러워 보이는 수가 있는데 안타깝게 <슬롯>은 후자다.
오래전 헤어진 여자친구가 난데없이 연락해와 함께 카지노에 가자, 가서 10억을 다 쓰고 오자는 제안을 듣는다는 시작은 신선했지만 그 이후가 문제다. 강원랜드에 도착한 일행이 카지노의 화려함과 추악함, 그 안에 있는 인간 군상들을 맞이하면서 겪는 생각의 교차. 비인간적이고 익명성인 세상을 카지노에서 발견하고자 했다면 너무나 얕은 수다. 그들이 발견한 건 화려함에 비해 초라한 인간들 - 강원랜드에 처음 간 사람들이 모두 느끼는 감정이다-과 돈을 잃을 수밖에 없게 설계된 과학적인 카지노의 인테리어와 시스템 - 이것도 웬만해서는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따위를 통해서 인생에 대한 고찰을 시도하다니, 뜻은 좋았지만 결과는 참담하다.
색다른 특별함을 보여줬다면 또 모를까, <슬롯>은 여러 모로 부족함이 많은 작품이다. 결정적으로 재미가 없다. 문장이 심플하고 서사가 단조로워 큰 고민 없이 술술 읽히기는 하지만 중반을 넘어가면서 이렇다 할 사건없음에 슬슬 지루함이 몰려온다. 옛 여자친구의 전남편을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게 가장 큰 사건이니. 그렇다고 깊은 삶의 고찰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삶은 불확정적인 도박과도 같다라는 명제를 펼쳐 놓고 염세적인 주인공 하나를 뱅뱅 돌려가며 권태와 단조로움을 표현한다. 아니, 하려 한다.
물론 온기를 잃은 인간이 되었다고 스스로 평가하는 것은 아니지만 타자의 세계에서 내가 일탈하고 있음은 느껴져. 그 정도는 알 수 있어. 주변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방식도 그렇고. 불필요한 오해를 사게 될 때도 있고, 정당치 못한 취급을 받을 때도 있어. 내가 원하는 것은 단지 온전한 시스템일 뿐인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많아.
이름 모를 주인공은 철저하게 이름을 숨긴다. 동명이인의 프론트 직원을 OOO으로 표기하는 식으로 나름 멋지게 주제의식을 간접적으로 두르려 한것으로 보이나 얕은 수다. 또, 프로그램을 전공한 저자의 이력을 활용해서 몇가지 컴퓨터적인 언어도 곳곳에 활용하고 있는데 특별하기 보다는 '나 이런 것도 시도했어'라는 마스터베이션이다. 소설 중간에 있는 문장을 보면 '운명의 destiny'를 읽는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린다.
if, 그가 나를 아직 원한다면, then.
go to, 잊었다고 말한다.
else if, 뭔가 다른 걸 찾고 있다면, then.
go to, 아무렇지 않은 듯 사라져 준다.
else if,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then.
go to,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else if,
go to, 기다림은 힘들다.
else if,
왜 여기가지 왔을까?
if......
프로그램은 멈추어야 한다.
그래도 만약, ...... 멍청한.
/end
소설이 끝나는 순간까지 카지노를 통한 인생의 탐구는 계속되지만 어정쩡한 마지막장을 넘기고 나면 권태만 남는다. 이게 의도라면 작가는 천재인듯? 소설의 시작에 이런 문장이 있다. "이 이야기는 도박과 여자에 관한 것이다. 이렇게 말해 놓고 보니 쿨한 인간이 된 느낌이다." 아마 이 소설은 쿨하게 보여지기 위해 쓴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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