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페스트에 병들다.
때는 11665년, 저세상에 입적한 그 수 몇 십만이랴.
그러나 나는 살아남았도다.
H.F
역사상 인류를 가장 위험에 빠트렸던 일은 무엇일까. 세계 2차대전, 냉전 사이의 핵전쟁 위기, 각종 전염병의 유행, 종교전쟁 정도가 꼽힌다. 그중에서도 최악은 흑사병이다. 1347년의 유행이 가장 최악이었는데 3년간 전 세계 2천만명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 당시의 인구숫자를 생각하면 재앙을 넘어 전멸 직전까지 갔다고 봐도 무방하다. 이후 간헐적으로 흑사병이 유행할 때 마다 사회는 극도의 혼란으로 빠져 들었고, 가장 문명화 된 영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660년과 70년 사이, 흑사병은 영국을 덥쳤고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힌 후에야 사그라들었다. 그 지옥의 한복판을 뚫고 나온 작가가 이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다니엘 디포. 로빈슨 크루소로 알려진 이 작가는 런던 한복판에서 흑사병의 피해를 똑똑히 목도하고 기록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시의 피해 정도, 정부의 대응, 사회의 분위기를 세세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성직자는 물론 내과 의사, 외과 의사, 약사, 시 당국자, 모든 계통의 관리 그리고 기타 헌신적인 활동을 했던 사람들의 명예를 위해서도 그들이 얼마나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하여 생명의 위험까지 무릅쓰고 활약했던가를 기록에 남겨 두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무려 5백년이나 전의 사회지만 이 기록에 나온 영국 정부의 대응은 놀랍도록 훌륭하다. 전화와 같은 커뮤니케이션 채널이 없는 상태에서 시체의 매장, 병자의 격리, 빈곤층에 대한 지원이 체계적으로 이루어졌다. 아무튼 영국의 관료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했고 이 점에 대해서는 디포 역시 공감하고 있다.
우리는 영화나 책을 통해 중세시대에 유행병이 돌면 길거리마다 시체가 넘쳐나리라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부는 시체를 매일매일 치웠고, 거리를 깨끗하게 만들었다. 어떻게 그런 혼란에서 이토록 깔끔한 대응을 할 수 있었을까.
시체의 운반이나 매장을 위해 고용된 인부가 병상에 드러눕거나 죽거나 하면 즉각 다른 사람으로 보충하거나 하는 기민성을 발휘했다. 앞에서 말한 시체 운반 같은 일거리를 찾아다니는 빈민들이 굉장히 많았던 까닭에 매장 인부의 인원 보충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결과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계속 죽어 나갔거나 병에 걸리더라도 매일 밤 깨끗이 정리되어 실려 나갔다. 그리하여 런던 시에 한해서는 '사망자를 매장하는 산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라는 말은 할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전염병 연대기>는 소설이 아니라 관찰일지다. 여기에는 디포가 직접 본 이야기와 들은 풍문이 혼재되어 있다. 죽음의 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는 진실과 소문이 섞이기 마련이지만 둘 다 참혹하기는 마찬가지다. 발병하면 하루 이내에 급사하거나, 아니면 고통스러운 1주일을 보낸 후에 죽는 병. 원인을 알 수 없고 무조건적으로 전염되는 병. 가족의 한 사람이 걸리면 모든이가 전멸하는 병. 흑사병은 좀비영화가 현실이 되는 것보다 훨씬 무서웠으리라.
(흑사병을 몰고 다니는 닥터 쉬나벨, 파울 페르스트, 1656)
그 중 사람들을 공포스럽게 했던 건 '가옥 폐쇄' 조치였다. 병에 걸린 사람과 그 가족을 집에서 나오지 못하게 하고 감시인을 두는 제도인데 런던시의 대응에 찬사를 보냈던 디포도 이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얼핏 당연한 조치처럼 보이지만 가옥폐쇄를 당한 집은 환자가 아닌 이들도 있다. 예를 들어 5명으로 이루어진 가족중 하녀 한명이 병을 얻었다고 하면 모든이가 죽을때까지 가옥은 폐쇄된다. 잔혹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효과적이지도 않다. 음식 공급, 야반도주, 시체 처리 등등 흑사병이 옮겨질 가능성은 여전히 존재한다.
가옥폐쇄는 사람들을 위축시켰고 환자가 발생해도 적극적으로 신고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한다. 흑사병이 퍼져 나간데에는 이같은 이유도 한 몫했다. 차라리 환자만을 격리했거나 했더라면 보다 적극적으로 신고가 이루어졌고 효율적인 통제가 가능했을텐데. 그러나 그 외의 대응은 모두 훌륭했다. 다니엘 디포는 이 모든 것을 자세한 기록으로 남겨 후세에 전했다. 병의 원인과 치료법이 없었기 때문에 종교적인 성찰로 마무리 되기는 하지만 집단 패닉 상황에서도 질서 정연했던 인류의 대응방식은 감동과 희망을 준다. 언젠가 비슷한 고난이 인류를 덥치는 때가 온다면 우리도 그리 대응할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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