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본국검법] 난세를 사는 조선 검객 이야기

슬슬살살 2017. 5. 9. 18:44

본국검법의 마지막 계승자 성준이 기억을 잃은채 일본에 표류한다. 그를 구한 이는 일본의 삼검신 중 일인 하나기리. 성별조차 불분명한 아름다움을 가진 하나기리가 성준과 함게 하면서 변혁에 휘말리게 된다. 때는 이름뿐인 천황 주변으로 다이묘들이 으르렁 대고 있는 전국시대다. 이른바 난세의 한복판에 남만으로 통칭되는 외부세력이 일본에 검은 손길을 내밀고. 정규군이 아닌 특정 세력들이 연합해 그들에 대항한다.


오랜만에 보는 무협이다. PC 통신에 연재 되었던 구시대 유물이지만, 나름 탄탄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내공과 기연의 대결만이 반복되는 무협의 기본 틀을 벗어나 전략적인 재미를 담으려 한 노력이 옅보이는 작품이다. 실제로 작가인 안병도는 이후에 밀리터리 소설에 참여하기도 했다.


중국이나 한국이 아닌 일본을 배경으로 한 점도 독특하다. 하나기리와 성준, 둘을 기본적인 주인공으로 하고 있지만 기하라, 나쯔히메, 한조 같은 조연들도 잘 써먹는다. 일반적으로 필력이 약하면 능력 부족으로 조연들을 모조리 한 파티 안에 때려 넣지만 본국검법은 조연들 고유 역할을 잘 유지했다. 이는 캐릭터들의 개성을 살리는 좋은 밑거름이 됐다.  


나를 보아주세요. 나는 최후까지 눈을 감지 않고 이 난세를 끝까지 볼 겁니다. 연약해져가는 마음을 이긴 후의 정말 강해진 모습으로... _덴노 나쯔히메


1부에서는 흑련종이라는 남만의 종파가 일본을 습격한다는 이야기다. 이에 대항해서 반목하던 풍마닌자와 이가닌자, 하나기리의 검술도장인 청풍관, 불교계의 혼간사가 연합한다. 초반에는 일반적인 무협처럼 진행되지만 회차를 거듭할 수록 전략적인 시도가 많아진다.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는 무협지 특유의 정서는 사라지고 전체의 판을 기술하려는 전쟁소설의 성격이 짙다. 예를 들면 삼검신간의 타이틀 매치보다는 공성전을 더 비중있게 다룬다던지...다만, 연재물의 특성상 쓸데 없이 늘어지는 경향이 있는데 조금 거슬리는 정도다. 철포에 대항하는 사무라이의 전략이라는 것도 흥미롭다. 여기에 무녀들의 마법이라던지 닌자의 인술같은 판타지 요소들을 적당히 버무려서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다만, 하나기리의 성별 문제를 명확히 하지 않은 채 이뤄지는 성준과의 러브라인은 좀 보기 불편하다.


2부 역시 외부세력에 대한 대응이다. 나쯔히메가 납치 당하고 아편에 절은 좀비까지 등장 시키는 등 새로운 시도를 하지만 1부의 신선함은 많이 망가진 상태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야구까지 등장시킨건 너무 오버한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화이팅같은 콩글리쉬까지 개그소재로 활용하는 건 일종의 강박으로 보인다. 하나기리의 성 정체성이 밝혀지는 것 외에는 특별함이 없는 2부다.

PC통신 시절의 연재작이니만큼 큰 기대는 하지 않는게 좋다. 그렇지만 여러가지 시도들은 지금 보더라도 신선한 것들이 많고 무엇보다 재미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소설이다. 평이한 무협에 지루했던 독자들이라면 충분히 즐거울 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