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달을 정복해 또 하나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2088년. 지구의 지축이 90도 뒤틀리는 대전도가 있었고 지구의 인류는 멸망했다. 달에 거주하던 월면 인간들은 2091년, 파괴된 지구에 상륙해 문명 재건의 씨앗을 뿌린다. 주요 도시 일곱개를 건설하고 각각 통치 세력을 내려 보내 식민지 역할을 하게 만든 것이다. 효과적인 지배와 만약의 위험을 없애기 위해 지구의 인간이 150m이상을 비행하거나 건축하지 못하게 했고 이를 어기면 올림포스 시스템을 이용해 응징했다. 24개의 레이저포가 일제히 사격을 가하는 이 시스템은 월면인간 전원이 바이러스로 전멸한 후에도 살아남아 작동하고 있다. 이제, 제어장치가 풀린 일곱도시는 전쟁과 정복의 초입에 들어선다. 인류의 역사가 늘 그랬던 것처럼. 다른 것이 있다면 항공이라는 개념이 사라진 전쟁방식이다.
적어도 80년도 전후에 태어난 남자라면 <은하영웅전설>을 모를리가 없다. 다나까 요시키라는 평범한 이름의 작가는 <삼국지>에 가장 근접한 전략 소설을 써냈고, 스페이스 오딧세이의 한 획을 열었다. <일곱도시 이야기>는 후속작을 기다린 팬들에게 가볍게 바친 단편집이지만 배경만큼은 장대한 서사시에 버금간다. 실제로 열광한 팬들과 후배들이 팬픽을 써서 출판한 일도 있을 정도다. 이 소설에는 다섯개의 전투가 소개된다. 각 도시국가들이 벌이는 전쟁에 대한 부분인데 전략적인 부분은 그 어떤 밀리터리 소설보다 박진감 넘친다. 단순히 육박전 중심의 묘사가 아니라 전략과 전략이 부딪히는 모습을 리얼하게 그려냈다. 거기에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 더해지니 삼국지 생각이 절로 난다. 게다가 문장은 얼마나 간결하고 시적인지. 다수 딱딱하거나 어려울 수 있는 전략, 심리를 직관적으로 나타낼 수 있는 언어를 적재 적소에 쓰고 있다. 마치, 위대한 인물들의 명언집을 보는 느낌.
"지면 도망칠 필요는 없어. 죽을 뿐이지. 하지만 이기면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으면 안 될거다. 원수는 지금 나를 의지하고 은혜를 느끼고 있지만, 일단 이기고 나면 공적을 독점하고 싶어질 테고, 내 존재가 거북해질꺼야. 그는 결코 악인이 아니지만, 착한 사람의 질투심은 악당의 야심보다 다루기 어려워. 도망가는 수밖에 없단다."
착한 사람의 질투심이 악당의 야심보다 다루기 어렵다는 말은, 대단한 통찰 없이는 쓸 수 없는 표현이다. 수많은 미사여구, 인물묘사보다 저 간결한 관용어구 하나가 이 작품의 가치를 드높인다. 게다가 배경 또한 전략적이다. 멸종한 월면인간과 올림포스 시스템이라는 설정은 과학은 발전했지만 전쟁규모는 제한적으로 만드는 효과를 발휘한다. 미사일, 항공이라는 선택지가 시나리오에서 지워진 전쟁의 개념은 필연적으로 현대전과 재래전이 혼합된 형태로 귀결된다. 이런 배경은 전술 폭을 단순하게 하고 전략적인 요소를 강하게 만든다. 쉽게 말하면 핵은 없지만 전차는 다양하게 있는 식이다. 여기서 작가의 치밀함이 돋보인다.
여기에 다나까 요시키는 실험을 하나 더한다. 바로 도시국가. 일곱개의 서로 다른 정치형태의 도시국가는 국경을 맞대지 않기 때문에 보다 단순하고 감정적인 이유에서 전쟁을 시작하고 끝맺는다. 게다가 서로 다른 정치형태는 인물의 스펙트럼을 훨씬 방대하게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잘 어우러진 최고의 결과물이 <일곱도시 이야기>. 한가지 단점은 짧다는 것. 그것 하나다.
단순히 착하고 용감한 왕자가 고생 끝에 대륙을 통일하는 따위의 이야기가 아니다. 전쟁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추악한 점과 이기심, 권력에 대한 욕구를 표현하고 그들을 비웃는다.
"시정부의 높은 분이 최전선에 나오셔서 명예로운 전사를 당해 주시면, 병사들의 사기를 끓는 점까지 상승시켜 드리죠."
그리고 그 조롱은 다시 현대 정치, 사회, 인간 전체의 부조리함을 꼬집는다. 그야말로 해학의 끝판왕. 대서사시와 정치소설을 엮었을 때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나오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가 <일곱도시 이야기>다. 물론 아무나 그렇게 하지는 못할 테지만. 다나까 요시키의 그 힘은 그야말로 악마의 재능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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