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뉴욕3부작] 작가와 등장인물의 복잡성에 대하여

슬슬살살 2017. 7. 5. 18:55

폴 오스터를 알게 됐던 <우연의 음악>을 생각했다가 생각보다 난해함에 당황했다. 도회적이면서 재기넘치던 이야기꾼은 <뉴욕3부작>에서 추상화를 그린다. 피카소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아방가르드적인 글쓰기다. 난해할 뿐 아니라 비유와 상징 모두 직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어렵다. 번역본을 봐야 하는 입장에서는 더 어렵다. 대놓고 보여주는 텍스트의 열쇠들, 이를테면 <월든>같은 단서들이 있지만 텍스트와 연결하기란 쉽지 않다. 끽해야 <월든>이 뭐더라 하고 네이버 검색이나 한번 더 하게 되겠지.


우리는 지금 있는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곳에 있다. 기질의 약점으로 인해 우리는 어떤 상황을 상정해서 우리 자신을 그 안에 놓고, 그에 따라서 동시에 두 가지 상황에 놓이므로 거기에서 벗어나기가 배로 어렵다.


<월든>에 나온다는 이 문장이야말로 <뉴욕3부작>을 관통하는 핵심 메세지다. 소설가가 창작하는 공간이 소설이라고 한다면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도 거짓이다. 그렇지만 그 안에 작가가 1인칭으로 등장하면 현실이 되기도 한다. 다시 등장했던 작가가 가공의 인물이라던가, 극 중 작가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폴 오스터라던가 하면 복잡성은 끝도 없이 증가한다. <뉴욕3부작>은 이러한 실험의 보고서다.


'유리의 도시'에서는 퀸이라는 작가가 등장한다. 사설탐정 폴 오스터를 찾는 전화를 잘못 받고 피터를 보호하는 역할을 하게 되는 퀸을 통해 가공과 현실의 세계를 혼잡하게 한다.  이 단락에서는 <돈키호테>라는 중요한 열쇠가 등장하는데 이 작품이 세르반테스가 산초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옮긴 것이며, 이는 돈키호테의 계획일 것이다라는 합리적 추정이다. 애초부터 돈키호테는 자신의 이야기를 전할 인물을 찾고 있었고 산초를 거쳐 세르반테스는 그 일을 하기만 했다는 이야기다. <유령의 도시>에서 폴 오스터와 퀸, 두 명의 스틸먼과 피터가 쉴 틈 없이 교차 등장하면서 누가 이야기의 주체인지 헷갈리게 만드는 것이 전형적인 돈키호테의 방식이다.


3부인 '잠겨있는 방'에서는 퀸이 실제 탐정으로 등장한다. 친구인 천재작가 팬쇼를 찾아 헤매는 이야기 속에서 퀸과 스틸먼의 등장은 헷갈림을 넘어 독자를 조롱한다. 이야기가 서로 꼬리를 물고 있는 작품들은 여럿 있지만 이 작품처럼 차원을 겹쳐가면서 등장하지는 않는다. 뫼비우스의 띠가 무엇인지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세가지 이야기 모두 누군가를 쫒는 이야기다. 재밌는 건 자신이 무엇을 쫒는지, 누구를 쫒는지 모른 다는 것.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유령들'에서는 서로가 서로를 쫒는 의미없는 일들을 반복하고 -의미없는 일에 대한 공포는 <우연의 음악>에서 잘 다뤘던 소재다.- '잠겨있는 방'에서는 사라져 버린 친구를 쫒는다. 모호함과 복잡성이 짙어서 쉽사리 눈치채긴 어렵지만 결국 감시받는 자나 하는 자나 모두 나 자신이다. 관찰을 통해서 이상한 이가 자신을 깨닫는 과정. <뉴욕3부작>이 다루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