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레테의 연가] 망각의 강을 건너는 사랑의 고백

슬슬살살 2017. 7. 9. 19:35

83년도에 초판을 발행한 이후 무려 41쇄나 찍어낸 밀리언셀러지만 그다지 뛰어난 작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유부남과 신여성의 사랑을 통해 현대의 성의식과 결혼관을 살펴본다니, 이런 신파가 있을까. 물론 사랑이라는 기본적인 감정과 사회의 도덕률이 충돌하는 순간을 담아내고 있어서 일일 연속극만큼이나 흥미진진하기는 하다. 원래 막장과 남 얘기만큼 재밌는게 없으니까. 게다가 이야기꾼이 악마의 재능꾼이라는 이문열이라면 신파조차도 특별해진다. 그렇지만 정작 저자 조차 부끄러워했던 작품이었다는 건 아이러니 하다.


독자의 사랑을 받을수록 부끄러워지는 책이 있는데, 내게 있어서는 '레테의 연가'가 그러하다. (91년판 머릿글)
'레테의 연가'는 한때 내 작품 목록에서 빼버릴까 했을 정도로 불만스러워 했던 작품이다.(94년판 머릿글)


시대의 가치관은 변하기 마련이지만 여성관, 결혼관은 그중에서도 가장 빠르게 변하는 가치다. 미국조차도 여성의 참정권은 100년이 채 되지 않았고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법적 부부와 동거남녀의 대우가 엄연히 다르다. 동사무소에 갔느냐 안갔느냐의 차이일 뿐인데 말이지. 아마도 빠르게 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신의 작품 속만 촌스러워 보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면도 없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재밌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유부남은 예술가이면서 고아다. 여자는 노처녀이면서 기자다. 이것만으로도 현대 드라마와 동일한 구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저 겉핥기 식일 뿐이고 쉽사리 마음을 표현하지는 못한다. 사회의 지탄이 두려워서.. 라고 보인다. 본인의 감정에 충실하겠다는 선택을 하기까지, 두 남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날을 지낸다. 그리고 그 둘은 사회의 관념에 어긋나는 선택을 한다.


모든 여행을 우리는 나름의 목적을 가지고 떠나지만, 대개의 경우 그 목적은 길에 오르기 무섭게 여행 자체의 특별한 파토스(주어진 상황에 의해 표출되는 감정, 영어로는 페이소스)에 밀려 원래의 의미를 잃고 만다. 낮선 곳으로의 길 위에선 외로움은 물론 슬픔조차 감미롭고, 두려움과 근심도 상쾌하게...


남자는 이혼을 선택했고 여자는 나쁜 여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일종의 여행처럼, 원래의 의미 대신 낮선 길을 택한다. 낮선 길이 주는 외로움은 슬픔과 두려움, 근심을 모두 상쾌하게 바꿔 놓는다. 물론, 시간이 지났을 때도 그리 할런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사랑은 답답한 면이 있지만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가, 라는 생각을 할 시간을 만들어준다. 35년전의 연애담인지라 유치한 건 어쩔 수 없다. 그 안에 있는 순수함이 귀엽게 느껴진다. 아무렴, 우리 엄마 아빠의 연애담이 아닐런가. 그 당시에 이정도 수준의 성담론을 떠올렸다는 것 만으로도 의미있는 작품이다. 소설의 제목이 '레테의 연가'인 건 사랑의 고백이 망각을 전제하기 때문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