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우리의 힘으로 무엇인가를 결정할 수 있는 순간은 지나가 버렸다. 내게는 오직 당신뿐이었지만, 당신은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내게는 오직 당신뿐이었지만, 당신은 내가 아니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표현을 쓰고는 있지만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좀 있다. 이 책에 실린 세 개의 단편은 모두 불륜을 담고 있다. 은사의 아내와의 불륜과 복수, 아버지의 정부와 같은 길을 걸으면서 나는 달라라고 얘기하는 치카, 20년 전 자신이 쓴 편지에 위로를 받는 이혼녀까지. 비틀린 상황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이야기들은 정상적인 사랑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극적이지도 않다. 주인공들은 이 이상한 상황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인생을 되새긴다. 선택의 순간들이 주어지지만, 이들은 자신만은 다를꺼야라고 생각하고는 옳지 않은 선택을 한다. '다윈의 법칙'의 치카는 가정을 버린 아버지와 그의 정부를 원망하지만, 정작 본인은 다를꺼야라고 생각하면서 히데이치와의 불륜을 이어나간다.
혹여 허황된 꿈일지라도 인간은 그 유일한 상대를 발견하기 위해 한 번뿐인 인생을 살아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종의 보존이나 진화'가 아니다. 한 번 뿐인 인생을 어떻게 하면 보다 풍요롭고 애정이 넘치는 삶으로 살아낼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첫번째 이야기인 '만약 진실을 안다 해도 그는'은 훨씬 충격적이다. 스와핑에 버금가는 불륜이 은사와 벌어지고, 심지어 아이마저도 스승의 아이다. 그럼에도 이치카와는 아내와 스승을 용서한다.
역시 사토미 고이치로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요 며칠동안 혹시 그가 몰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모두 잘못된 생각이라는 확신이 들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는 언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걸까? 만일 내가 히사코와 결혼하기 전에 그 사실을 알았다면, 나와의 결혼도 후미히코의 탄생도 그리고 그가 죽기 직전에 히사코에게 걸었던 전화도 모두 사토미가 정교하게 만들어낸 복수극의 일부일지도 모른다.
일본의 연애소설은 무라카미 류식의 농염한 이야기부터, 에쿠니 가오리 같은 달달한 담론까지 다양하지만 시라이시 가즈후미의 '지금 사랑해'는 더욱 독특한 위치에 있다. 젊은이가 아니라 어느정도 농익었을 뿐 아니라 외로움과 생활 사이에서 고민이 많은 어른아이의 이야기. 몸은 커졌지만 정신만큼은 20년 전의 어린시절과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은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 30대 여성들에게 이 단편집이 먹혀들었나보다. 순수하지는 않지만 완전히 선택에 책임을 두려워하는 어른 아이들에게...
하지만 실제로 20년이 지난 지금, 미사키는 아직도 자신이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것도 놀랍고도 한심할 정도로. 아니 그보다는 인간이란 본래 어린아이의 상태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내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디고 한다. 서른 아홉이 된 지금도 그녀는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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