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은 <링>으로 혜성같이 나타났다 사라진 '스즈키 코지'의 데뷔작이다. 비디오로 전염되는 독특한 죽음을 소재로 한 <링>도 충격적이었지만 <낙원> 역시 재기발랄한 구상이 엿보이는 참신한 작품이다. 이토록 장르적인 재능을 가진 작가가 이후 작품이 전혀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낙원>은 로맨스 판타지다. 고대, 중세, 근대 세 시대를 관통하는 트롤로지로 일만년에 걸친 치열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다. 단순히 윤회에 기반한 전생 로맨스물이 아니다. 수만번의 사랑과 죽음, 치열하게 동쪽으로 향하는 종족의 본능을 세편의 단편에 함축적으로 담았다. 첫 번째 이야기는 신화. 유사 이전 고비사막에서 살고 있던 유목 민족의 이야기를 그렸다. 금지된 그림을 그렸다가 사랑하는 이를 빼앗긴 보그도와 그의 아이를 가진 채 다른 부족에게 끌려간 파야우. 이문열의 <들소>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이지만 베링해협을 건너는 여인과 그를 쫒아 대양을 항해하는 남자의 이야기는 판타지의 절정을 보여 준다.
처음에 그들은 이 길이 정말 비옥하고 온난한 대지로 이어지는 길인지 의심하였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갈 수록 순록과 사향 소떼가 앞길을 가로지르고, 그 숫자가 점차 늘어나는 것을 보고 희망이 용솟음 쳤다. 어느새 사방에는 얼음을 대신하여 푸른 초원이 펼쳐지고 있었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북의 부족들은 전설이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번째는 '낙원'이다. 동쪽으로 동쪽으로 향하던 보그도의 후손은 어느덧 폴리네시아 어느 섬에 뿌리를 내린 것 처럼 보인다. 지상 낙원 같은 이 섬에 유럽 난파선이 떠내려 오고 선원들과 부족민들이 평화롭게 살고 있지만 또다른 유럽인들이 섬을 습격하고 낙원은 파괴된다. 바다의 두려움, 난파, 조난, 해적의 이야기가 빠르게 전개 되는 이번 편은 그야말로 모험 소설의 정석을 보여 준다. <보물섬>이 떠오를 정도로 리듬감 있는 항해 모험이 이어지고 있어 소년이 된 것 같은 즐거움이 느껴진다. 전편보다 구체적인 스토리 라인에도 신비적인 분위기를 놓치지 않고 있어 작가의 필력을 다시 보여준다.
물론 원하기만 한다면 존스 역시 그 은총을 만끽할 수 있었다. 낙원... 지옥을 헤매다닌 후에 도착한 그곳은 낙원이었다. 이 낙원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존스도 라이아처럼 그렇게 믿었다.
습격자들을 피해 항해를 선택한 라이아의 부족이 항해를 결심하는 순간도 의미심장하다. 정든 터전을 버리고 동쪽으로 간다는 그 선택을 타로파 부족은 덤덤히 받아들인다. 마치 유전자에 새겨진 보그도의 신념이 그들을 부추기는 것처럼 그들의 선택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신화적이다. 마지막 사막편에 이르러 일만년의 웅장한 오페라는 그야말로 절정으로 치닫는다.
"즉, 발견과 창조야. 과학적인 천재는 영감을 받아 우주의 법칙을 발견하지. 그리고 예술가는 역시 똑같은 힘으로 창조를 행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네. 그런데, 문득 어느 때, 어쩌면 그 양쪽 다 어떤 의미에서는 발견일지도 모르겠다고... 창조란 요컨대 새로이 태어나는 것이지만 그건 인간이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영역이 아닐까 하고,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었네. 자네가 내 말을 알 수 있을까."
폴리네시안의 피가 흐르는 천재 음악가 레슬리가 운명처럼 인디안 혈통이 흐르는 플로라를 만난다. 단지 전화 통화를 했을 뿐이지만 그들은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보고 기다린다. 그리고 사막 한복판 종유 동굴에서의 만남은 극적이고 아름답다. 사슴의 형상이 파란점으로 나타나는 만화적인 설정조차 유치하지 않고 신비롭다.
긴 여정이었지만 간신히 두 사람은 출발점으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새로운 생활을 향하여 이제 첫걸음을 내디디려 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묘사, 일만년을 관통하는 주제의식, 아시아계 이동의 역사와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더해져 압도적인 스케일의 '베린지아'를 만들어냈다. 마지막 '사막'편이 오케스트라를 소재로 삼고 있는 건 우연이 아니다. 짧은 세 편의 단편에 밀도깊은 이야기를 담아낸 '스즈키 코지'의 역량에 감탄하게 되고 더이상 나오지 않는 그의 소식에 다시 한번 안타까움을 느낀다. <낙원>은 언제 읽어도 푸른 초원을 떠올리게 하는 청량감을 준다. 정말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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