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야, 고대 이집트, 아테네 문명, 조선, 로마... 이들은 모두 멸망, 즉 종말을 맞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후대인들은 멸망한 그들로부터 많은 매력을 느낀다. 번영한 사회가 맞이하는 비극적인 결말 속에 숨어 있는 많은 아름다움을 상상하면서 기꺼이 비극의 주인공이 되려 한다. 이런 아이러니는 장르적인 특수성을 지니고 있는데 많은 포스트 아포칼립스물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인류가 멸망하면, 우리가 아는 세상과 삶은 어떻게 되는 거지?"
멀리 보지 않아도 수많은 영화와 만화, 게임에 이르기까지 종말을 소재로 하는 창작물은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이 <종말문학걸작선>이 특별한 이유는 수많은 작가들의 다양한 시선을 볼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기 실린 스무편 이상의 단편들은 모두 종말을 다루고 있지만 영웅주의나 패권주의, 잔인한 인간의 미래는 찾아 볼 수 없다. 대다수의 작품은 극단적 허무주의에 빠져 있거나 냉소를 가득 머금은채 인간을 관조한다. 그들으 시선을 인간이 아니라 멸망 그 자체에 포커싱한다. 게다가 우리가 상상하는 종말이 아닌 경우도 많다. 가장 충격적인 '최후의 심판'은 그야말로 비틀린 시선을 어디까지 가져갈 수 있을지 궁금해지는 작품이다. 우주에 가 있는 사이에 예수가 지구에 재림한다. 모든 인류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지구에 착륙한 지구인들이 겪는 혼란. 과연 신은 있는 것인가 하는 근원적 물음부터, 핵전쟁을 벌여 예수를 다시 오게 하려는 노력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종말의 개념을 근원부터 뒤흔드는 재기발랄함을 보인다.
우리는 종말 이후의 세계는 인간성이 결여된 살육의 시대로 상상하지만 많은 작품은 그렇지 않다고 설명한다. 물론 가치관이 뒤바뀌어 잔인한 삶이 반복되기는 하지만 인간성이 완전히 말소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핵전쟁 이후 눈에 뒤덮인 곳에서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아직 몰라. 너희들은 눈을 생각할 때 뭐가 떠오르지?"
"죽음"
"그래,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일이 있기 전 눈은 기쁨을 뜻했단다. 평화와 기쁨"
"상상이 안가"
"그래, 그게 요점이니"
종말은 상상할 수 없다. 그 이후는 더더욱. 수많은 작가들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다를 수 있다. '종말문학걸작선'은 종말의 형태보다는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해 끊임없이 고찰하게 만든다. 단순한 장르문학으로만 접근한다면 지루할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종말 이후의 세계를 상상함으로서 인간성의 근원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던질 수 있다. 죽음이 우리에게 종교를 산물한 것 처럼. 미국 내에서 전쟁이 일어날 일은 없겠지만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미국이 자국이 참전하는 전쟁에 대해 다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IF'에서 찾아지는 결론은 'HOP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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