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수레의 책읽기

[탁류] 풍파에 휩싸인 여인의 고난사

슬슬살살 2017. 10. 1. 21:01

그들은 진실로 이러하다. 그들은 딸자식 하나를 희생시켜서 나머지 권솔이 목구멍을 도모하겠다는 계책을 적극적으로 세우고 행하고 할 담보는 없다. 가령 돈 있는 사람을 물색해 내서 첩으로 준다든지, 심하면 기생으로 내앉히거나, 청루에다가 팔거나 한다든지 그렇게 하지는 못한다. 비록 낡은 것이나마 교양이라는 것이 있어 타성적으로 그놈한테 압제를 받기 때문이다. 교양이 압제를 주니 동물적으로 솔직하지 못하고 인간답게 교활하다.


채만식의 '탁류'는 일제 치하에서 가난에 쪼들리는 민중의 일상을 담고 있다. 일제의 압제나 잔혹함 보다는 급격한 시대변화가 주는 일상의 흔들림을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어서 저항이나 시대정신과는 조금 거리가 있다. 그러나, 우리가 주로 접하는 당시 작품 대부분이 민족주의적인게 많기 때문에 당시 생활상이나 지식인의 관점을 자연스레 엿볼 수 있는 이런 작품이 더 의미 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에 따른 한 여인의 고난사를 담고 있지만 재기발랄한 문체가 작품의 무게를 적절하게 가다듬는다.


작품의 첫머리는 정주사의 등장으로 시작한다. 나름 구학과 신학을 두루 배웠지만 쓸모없는 인간으로 전락해 미두장을 기웃거리는 그의 모습은 당시 한국의 모습을 정확히 보여 준다. 전통적인 가치의 쓸모 없음을 이토록 치열하게 꼬집는 작품이라니.. 하긴 당시 개화한 이들의 눈에 전통의 모습이 이렇게 비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급격한 사회상의 변화는 지금보다 더 심각한 세대간 균열을 만들어냈고 그 균열은 초봉이라는 희생양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다.


정주사에게는 4남매가 있다. 초봉이라는 첫째 딸이 '탁류'에 휩쓸리는 비련의 여주인공. 지방 은행에서 근무하지만 천하기 그지 없는 고태수와의 결혼과 짝사랑하던 승재와의 이별까지는 흔한 신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혼 열흘만에 남편이 유부녀와 정을 통하다 맞아 죽는 것이라던지, 자신을 노리던 형보에게 겁탈을 당하거나 하는 건 급격한 탁류다. 이 거친 세파에 청초하던 초봉은 휩쓸려 버리고 만다. 이후, 서울로 가서 마을 유지인 제호의 첩 생활을 받아들이는 건 생에 대한 체념이다. 다만, 누구의 아이인지 모를 송희만이 그녀의 희망이다.


내 몸뚱어리는 이미 버린 몸뚱어리다. 두 남편에 벌써 세 남자를 치러 온 썩은 몸뚱어리다. 이런 썩은 몸뚱어리가 아까워서 송희의 위험을 막아 주기를 꺼릴 필요는 조금도 없다. 형보? 좋다. 형보는 말고서 형보보다 더한 놈도 좋다. 원수는 말고 원수보다 더한 것도 상관 없다. 송희만 탈 없이 편안하게 기르면 그만이다.


모든 풍파를 겪고 결국 그토록 증오하던 형보의 아내가 된 초봉. 초봉을 자신의 소유물로만 생각하고 그녀를 괴롭히는 형보를 견디고 견디지만 송희에게까지 손찌검을 하는 그를 결국, 초봉은 죽이고 만다. 시골의 순박하고 청초한 여인 하나가 살인자가 되는 순간이다.


"네에"
고즈넉이 대답하고, 숙였던 얼굴을 한번 더 들어 승재를 본다. 그 얼굴이 지극히 슬프면서도 그러나 웃을 듯 빛남을 승재는 보지 않지 못했다.


'탁류'는 초봉의 고난만 존재하지는 않는다. 맨 마지막 작은 희망을 남겨두는 친절을 잊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마저도 이룰수 없는 허상으로 보여서 더 서글프다.